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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둘레길, 남산야외식물원...)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 나들이 '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 남산 N서울타워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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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 진한 추억이 서려있는 서울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문득 그의 품이 그리워
꼬마 시절의 흐릿한 추억도 잠시 소환해볼 겸, 간만에 남산을 찾았다.

남산으로 오르는 길은 정말 다양해서 취향에 따라 골라 잡으면 된다. 이번에는 나의 첫 동
네였던 약수동(약수역)에서 남산 나들이의 첫 단추를 여밀었는데, 약수역과 동대입구역(장
충동) 중간 고개 정상부에 두 골목길(동호로17길, 동호로20길)과 만나는 4거리가 있다. 그
왼쪽(남쪽) 골목길(동호로17길)에 남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이 눈짓을 보낸다.


 

♠  한양도성(漢陽都城) 장충동 지구 - 사적 10호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1)

다산동(옛 신당2동, 신당2동과 3동 일대를 약수동이라 불렀음)과 장충동(奬忠洞) 경계에 자리한
성곽을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문화재청에서 그렇게 부름)라 부른다. 장충체육관 동쪽에서 반
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옛 타워호텔) 뒷쪽까지 이어지는 약 1.1km의 성곽으로 왜정(倭政)과 6.25
를 거치면서 도성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무거운 상처를 입은데 반해 이 구간은 그 시련을 잘 극
복하여 옛 도성(都城)의 위엄과 고색의 내음을 짙게 선사한다.
허나 '장충체육관~광희문' 구간과 옛 타워호텔 남쪽 구간이 20세기 혼란기를 틈타 장대한 세월
의 의해 지워지면서 양쪽이 모두 끊긴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장충동 지구 성곽길은 오랫동안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있다가 도보길 유행에 따라 성 바깥에 탐
방로를 내고, 성곽길 또한 모두 해방되면서(신라호텔 구간도 포함) 성 안/바깥 산책이 모두 자
유로워졌다.
이 탐방로는 옛 타워호텔을 거쳐 국립극장, 남산까지 이어지며, 길 중간에 암문이 있어 성곽길
이나 성밖 길로 갈아탈 수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도심의 든든한 갑주, 한양도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던 고려 왕조를 싹 갈아엎
고 조선이란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
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명망이 높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전국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
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보수 작업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가히 조선 최대였다.
아무리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라지만 무척이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에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
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되었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
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
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래서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아보고자 온갖 원성을 들
어가며 단단하게 지은 도성이었지만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
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던 도성, 허나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
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
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뽐내던 한양도성은 근대
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하시라며 전차(電
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해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
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문의 양쪽 성벽
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
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괴상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
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고, 1910년 이후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서대문<돈의문
(敦義門)>까지 헐값에 민간에 매각하여 없앴으며,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
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였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발
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문(
城門)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
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
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
공원, 서울시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교, 장충단고개~옛 타워호텔 남쪽, 장충체육관 동쪽~
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고개~성북동>
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
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
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둘러싸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도 크
게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
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곽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
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2)

나의 옛 고향인 약수동(藥水洞) 뒷쪽(서쪽)에 병풍처럼 둘러진 장충동 지구 성곽은 조선 태조와
세종 때 축성된 성벽이 거의 그대로 전하고 있다. 성벽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성돌은 수백 년
이나 숙성된 고색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여져 있어 까무잡잡한 피부를 이룬다. 그들 사이로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이 군데군데 자리를 닦으며 선배 성돌을 닮아간다.

성 바깥 탐방로 부분은 예전에는 거의 수풀이 무성했고, 성곽길 통제 구역이라 마음 놓고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세상이 많이 바뀌어 그 자물쇠가 풀리면서 자유롭게 두 다리를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한양도성을 살펴보면 간혹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공사 구역 표시
와 공사 담당 고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적은 것으로 여기서는 담당 고을
과 구역 정도만 나왔는데, '?海始面' 이라 쓰여 있다. (앞 글자는 모르겠음) 그것을 통해 해로
끝나는 고을 사람들의 공사 구간이 여기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참고로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성곽 전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
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해 지(地),
현(玄)...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의 암문(暗門)

한양도성은 4대문 4소문 외에도 숨겨진 암문을 여럿 두었는데, 이 암문도 그중 하나이다. 약수
동(다산동)에서 국립극장과 남산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지름길로 약수동에 살던 시절 많이 이용
했던 문이라 옛 친구처럼 무척 반갑다. 여기서 성안 또는 성바깥 탐방로로 바꿔 탈 수 있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3)
국내외 졸부들이 많이 자고 가는 붉은 색의 신라호텔이 바라보인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쪽 종점 (성곽마루 입구)

장충체육관 동쪽에서 시작된 장충동 지구 성곽은 옛 타워호텔 뒷쪽에서 뚝 끊기면서 성곽 탐방
의 흥을 깨뜨린다. 성곽은 남산을 거쳐 북악산까지 내달리고 싶으나 옛 타워호텔과 장충단고개
구간이 복원되지 못해 여기서 옆구리를 보이며 강제로 길을 접고 만 것이다.

이곳에서 성곽길로 갈아타 다시 장충체육관 방면으로 이동해도 되고, 옛 타워호텔 뒷쪽으로 난
산책로로 국립극장 방면으로 넘어가도 된다. 그리고 남쪽에는 성곽마루란 2층 정자가 있으며,
동쪽은 약수동(다산동) 주택가로 6호선 버티고개역과 이어진다.


▲  장충동 지구 남쪽 종점에서 바라본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
내 인생의 거의 40% 가까운 시절을 보냈던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약수동도 그렇고 옛 신당3,4동 지역은 달동네의 정석을 보여주던 동네였는데
개발의 칼질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  성곽 탐방로 (남쪽 종점 주변)

▲  성곽마루 2층 정자(亭子)

성곽마루는 약수동(다산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다산동 주택가 바로 뒷쪽이다. 성곽
탐방로를 닦으면서 새로 지은 정자로 이곳에 오르면 남산 동부와 신당동, 약수동, 한남동, 장충
동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  성곽마루에서 바라본 약수동과 신당동(新堂洞) 지역

▲  성곽마루에서 바라본 한남동(漢南洞)과 용산구 지역

▲  지워버려야 될 남산의 옥의 티
졸부들이 몸을 푸는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
(옛 타워호텔) 운동시설

▲  타워호텔 남쪽을 거쳐 국립극장으로
넘어가는 탐방로


▲  저만큼 멀어진 성곽마루 정자

성곽마루 입구에서 나무로 만든 탐방로를 따라 가면 옛 타워호텔 경내로 이어진다. 지금은 외우
기도 어려운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로 간판을 갈아서 그 이름만 봐도 적지 않게 눈과 머리를
고달프게 한다. 이름도 외우기 힘들고 말이다,
이곳은 이 땅에 잘나가는 고급 호텔로 졸부들의 낙원과 같은 곳이라 그 이름만큼이나 유쾌한 곳
은 아니다. 한복을 매우 싫어했던 신라호텔과 나란히 손 잡으며 남산의 경관을 해치고 있는 옥
의 티로 도성과 남산 숲 복원을 위해서는 언젠가 쿨하게 지워야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국립
극장도 마찬가지이나 여긴 대중적인 공간이니 봐주자~!)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옛 타워호텔을 지나 국립극장교차로에 이르니 온갖 나들이객들로 길거리가 북새통을 이룬다. 우
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오뎅과 번데기 등으로 허기진 배를 달랜 다음, 성난 파도처럼 몰려드
는 인파 속의 하나의 점으로 묻혀 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남산둘레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인데,
북쪽 길은 남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수레의 바퀴 자국을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거의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삼국지의 주요 인물인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와룡묘(臥龍廟)가 있다.
그리고 남쪽 길은 남산 정상과 N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
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되면서 '국립극장→남산 정상 밑→남산도서관' 방
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서식했던 어린 시절, 가족 또는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상춘약수터) 입구까지 차
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갈림길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장으
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하는 것은 조금은 옳지 못하지만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고 해서 몇 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산의 건강과 도보길 활성화를 위해 도로 폭의 1/3 정도를 잘라서 뚜벅이길을 닦았고 차
량 통행에도 크게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
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02,03,05번)와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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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공원길 (서울타워 방향)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다시 모습을 비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여기서 정상 쪽으로 이어지는 성곽 밑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
까지 보다 빨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도로로 가는 것보다는 짧은 거리이고 제일 최근에 개방된 남산의 따끈한 속살 부분이라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성곽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
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으니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에 의해 냉수마찰이
라 불리는 샤워를 받곤 했다. 특히 겨울에도 그랬었지.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감기가 안걸린
다나..?
예전에는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서울에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서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그래서 차츰 사
라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공원길 아랫 전망대

▲  남산공원길 아랫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산 정상까지 가다보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전망대 2곳을 만날 수 있
다. 이들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과 동작
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대모산 등이 사이좋게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
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낙타산)과 더불어 한
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백
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 보면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찾는 휴
식처이며, 경주 남산(468m)과 충주 남산(663m) 등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
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하며, 그 외에 인경산(引
慶山),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리기도 했다.
1395년 태조는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
祠)를 남산 정상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
고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
에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
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은 악명
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비
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
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開化期)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
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고,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이던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으니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쓰레기 잡귀들로 바뀌고 말았다.
왜정이 남산에 남긴 잡다한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
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긴 채, 1945년 8월 패전 당시, 연합군에 살려달라며 비굴
하게 굴던 왜왕(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
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
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인 서
울타워(남산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이름을 N서울타워로 갈았다.


▲  남산공원길 (아랫전망대와 윗전망대 사이)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악
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많은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남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
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남산이 베푼 약수터가 뿌리를 내리며 나그네의 목을 축여주고 있는데, 그중에
서 부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
라진 상태이다. 그외에 많은 약수터가 있으나 도심 속에 있다는 단점으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
다. 이미 몇몇은 부적합으로 문닫기 직전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과 여러 갈래의 계단길, 숲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공원에서 정상 동쪽
까지, 남산도서관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그외에 남산1호터널과 필동, 후
암동(厚岩洞), 남산야외식물원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길 외에는 모두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
의 접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
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
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N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산책.나들이 명소 및 조촐한 등산 명소로 나날이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서울에 오면 꼭 가야 되는 서울의 상징적인 명소로 외국인 관광객까지 날을 가
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든다. (서울을 찾은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
단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 인왕산, 조선 왕궁과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의 옛 추억이
수십 권씩 녹아있는 살아있는 일기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신당동과 금호동 시절 물을 뜨러 온 횟수만 수백 번이 넘고, 친구들과도 지겹도록 올랐다. 그때
는 오로지 두 다리로 돈 한푼 없이 남산 정상과 약수터를 오갔지. 무일푼으로 갔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남산이 베푼 약수와 청정한 기운 뿐이다. 그래도 그때는 참 가슴이 찡할 정도로 재밌
었고 행복했었지. 지금 아무리 많은 돈을 들고 남산에 안겨도 그때의 기분과 행복은 절대 재현
하기 힘들다.
어린 시절 그렇게나 안겼던 남산은 나이를 먹으면서 그 애정도 푹 식어버렸다. 그나마 요즘 들
어 방문 횟수가 조금 늘긴 했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2~3번도 갈까말까였다. 아마도 옛
시절에 지겹도록 안겼던 탓은 아닐까?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한남동과 보광동, 이태원, 강남, 관악산 산줄기, 국립현충원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동작구 지역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후암동, 용산구, 마포구, 여의도 지역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N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과연 어떻게 만들었을까?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3, 05번 종점)에 이르니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
시내로 내려가는 사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룬다. 시내버스와 관광버스
가 멈추기가 무섭게 무수한 사람들을 뱉어내면서 그 시장통을 더욱 부추긴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없음)
이곳에서 무수한 인파의 물결을 뚫고 경사가 좀 각박한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과 서울타워이며, 서남쪽 남산공원길을 내려가면 남산도서관과 소월길로 이어진다.

※ 남산 정상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6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뒷쪽으로 돌아가면 4거리 남쪽, 국립극장
  방향에 정류장이 있음)에서 02, 03, 05번 시내버스 이용
* 국립극장(남산, 한남동 방향 정류장)에서 02, 03, 0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4호선 충무로역(2번 출구)에서 02, 0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과 9호선 신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논
  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신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02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
  하차, 정상까지 도보 25~30분
* 지하철 1,4호선 서울역 9번 출구에서 03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서울역버스환승센터(9-1번 출구
  )에서 402,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 장충단공원(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도보 50~60분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필동, 예장동, 회현동 / 용산구 후암동, 한남동 등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야외식물원(야생화공원)까지

▲  남산 팔각정(八角亭)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N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 등이 있다. 그 현장에서 남북으
로 펼쳐진 일품 조망을 누려본다.
마치 천상(天上) 세계로 인도하는 탑처럼 하늘 높이 솟은 N서울타워는 초등학교 시절 2~3번 가
본 인연이 있다. 허나 그 이후로는 이상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정상까지 오더라도 그저 타워
밑에서 좀 맴돌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막상 가려도 해도 미친 입장료로 딱히 땡기지도 않는다.

N서울타워와 남산봉수대 사이에 자리한 팔각정은 서울타워와 함께 남산을 빛내는 보석의 하나다.
이곳에는 1959년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치켜세우고자 그의 호를 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
는데, 1960년 4.19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의 팔각정
을 본 따서 지금의 팔각정을 지어 남산타워를 수식하는 존재로 삼았으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
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팔각정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나무가 무성해 산바람이 늘 머물고 있
으며, 정자 자체는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나 N서울타워, 봉수대와 더불어 남산 꼭대기를 수식
해주는 남산의 주요 상징물이다.


▲  남산서울타워 종점 남쪽 한양도성과 오솔길

정상이란 자리에 오래 머물러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적당히 있다가 내려와야 뒷탈이 없다.
이번에는 남산도서관 방면 대신 오던 길로 내려가 남산야외식물원으로 길을 잡았다.

남산공원길 윗전망대를 지나면 야외식물원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살며시 손을 내민다. 남산에서
는 별로 없는 흙길로 남쪽 자락에 조성된 소나무숲을 지나가는데 그 길을 7~8분 정도 내려가니
남산야외식물원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남산야외식물원

소월로와 접한 남산 남쪽 끝에는 남산야외식물원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에는 외인아파
트 2동이 남산을 건방지게 가리며 흉물스럽게 있었는데, 1994년 그 아파트를 쿨하게 밀어버리고
9,811㎡ 부지에 야생화공원을 닦으면서 남산야외식물원은 시작되었다. 즉 아파트의 희생으로 태
어난 신선한 공간인 셈이다.

1995년 전국 광역단체 시도에서 옮겨온 소나무 80그루로 팔도소나무숲을 닦았으며, 1997년 2월
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2년 4월에는 이 땅의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화 185종과 나무
93종을 심었고 생태연못을 조성했다.
야생화공원을 포함한 공원 면적은 59.241㎡, 품고 있는 식물은 10여 개의 주제(죽림원, 알뿌리
식물원, 설화/연료식물원, 양치/음지식물원, 팔도소나무단지, 서울시보호식물원, 화목원, 남산
자생식물원, 나무밑 야생화원, 음지식물원, 4계절야생화원, 약용식물원, 향기식물원, 생태연못
등)로 나눠 배치했으며, 현재 식물 269종 117,132주가 심어져 거대한 야외식물원을 이룬다.

이곳 야외식물원의 중심은 야생화공원이며, 그외는 그냥 자연공원이다. 숲이 짙고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으며, 야외식물원이라고 하여 입장료를 받거나 관람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은 절대 아
니다.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포근한 공간이다. 이처럼 좋은 곳을 이제서야 오다니! 남산을 안방
처럼 들락거린 나인데, 그동안 등잔 밑이 어두웠던 모양이다.


▲  주말 오후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남산야외식물원 산책로

▲  야생화공원 산책로 갈림길

▲  대나무 잎소리가 사각사각 속삭이는 죽림원(竹林園)

▲  전국에서 가져온 소나무의 안식처 팔도소나무단지
남산이 소나무로 유명하다보니 천하에서 80그루의 소나무를 소환해
이렇게 소나무단지를 닦았다.

▲  솔내음이 속세에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는 팔도소나무단지

▲  팔도소나무단지의 상징, 정2품송 맏아들나무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이 땅의 소나무 가운데
단연 스타급의 존재이다. 그 나무가 서울에 살짝 아들을 두니 그가 이곳에 있는 정이품송 맏아
들나무이다.
정2품송의 씨앗을 이용하여 심은 그의 첫 후손 나무로 2010년 4월 5일 식목일에 서울시장과 산
림청장 정광수가 식재했다. 지금은 비록 10살도 안된 나이라 많이 초라하지만 기백(幾百)의 세
월이 흐르면 그 아비처럼 멋드러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내 생애의 그가 어
른이 되는 모습은 볼 수가 없구나.. 사람이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나무보다는 생명줄이 훨씬 짧
으니 말이다.


▲  생태연못으로 인도하는 생태계곡 산책로
야외식물원 서쪽에는 2002년에 지어진 생태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서 발원한
조촐한 계곡이 싱그러운 자연을 머금으며 세상으로 흘러간다.

▲  생태계곡의 으뜸 양념, 물레방아의 위엄

▲  수중식물과 개구리가 마음껏 나래를 펼치는 생태연못

2002년에 조성된 생태연못에는 연꽃을 비롯해 많은 수중동물/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식물이 너
무 무성해 마치 자연 속의 늪지대를 보는 듯 한데 연못은 조촐한 크기로 주변에 산책로와 나무
데크길이 놓여져 있으며, 연못 중간에 나무 다리가 운치를 더한다.

생태연못을 끝으로 남산 나들이는 이렇게 막을 고한다. 남산야외식물원은 마치 주마등(走馬燈)
처럼 둘러보았는데, 어차피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다시금
둘러보고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생태연못

※ 남산야외식물원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2번 출구)에서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얏트호텔 하차, 정류장 바로
  뒷쪽이 남산야외식물원이다.
* 서울역버스환승센터(1,4호선 서울역 9-1번 출구)에서 402,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얏트호텔
  하차
* 2호선, 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 9호선 신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논현역 중
  앙차로 정류장, 3호선 신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02번 시내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2동 258-148 (소월길 323 ☎ 02-798-3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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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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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6/04/12 12:49 | 서울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늦가을 나들이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백악산) 나들이 '

북악산 한양도성길 (백악쉼터 부근)

▲  북악산 한양도성길

▲  숙정문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네이버블로그글 보러가기
http://blog.naver.com/py1978/220548857265


가을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11월 한복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을
찾았다.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 명
수학교 종점으로 이동했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로 일컬어지는 성북동(城北洞)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로 정말 지겹도록 찾은 곳이건만 매년 10번 이상 발을 들일 정도로 나의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곳이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하는 조
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도심을 비웃듯 산골 풍경을 여실히 비춘
다. 길 왼쪽에는 진하게 숲이 우거져 있고, 북악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하며 흘러가는데, 그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울긋불긋 타오른 나무들은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고 있고, 그들이 뿌려놓은 은행잎과 단풍잎
은 귀를 접고 누워 있다. 은행잎은 누가 쓸었는지 가장자리로 수습되어 자연산 황금빛 카페
트를 자아낸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오르막 길이 펼쳐지는데,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에서 도심을 이어주는 터널인데,
겨우 2차선 크기로 폭이 좁으며, 4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해 삼청각(三淸閣) 앞에 닦여진 횡
단보도에서 보행자용 신호 버튼을 눌러 파란불을 소환해 건너는 것이 좋다. 물론 수레의 눈
치를 적당히 보며 건너가도 된다.

길을 건너면 홍련사(紅蓮寺)로 가는 길과 북악산으로 가는 길이 나란히 나타난다. 초행자는
자칫 햇갈리기가 쉬운데, 오른쪽 평탄한 길이 홍련사로 가는 길이며, 왼쪽 계단길이 북악산
과 김신조루트로 가는 길이다. 홍련사로 가는 길은 단지 홍련사만 이어줄 뿐, 다른 곳과 이
어지지 않으며, 절 입구에 정열적으로 타오른 단풍나무가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앗아간
다. 저 길로 들어서면 나도 저들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아닐까?


▲  늦가을에 잠긴 삼청각, 숙정문안내소 가는 길

▲  늦가을이 화사하게 불을 질러놓은 붉은 단풍이 마중하는
홍련사(오른쪽) 입구와 북악산, 숙정문 입구(왼쪽)


 

♠  북악산(백악산) 입문

▲  북악산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직전)

북악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오르면 2007년에 북악산 개방 기념으로 조림(造林)한 것을 기리
고자 세운 표석이 있고, 그 표석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
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로 이어지며, 직진을 하면 북악산 주능선의 주요 관
문인 숙정문안내소이다.


▲  북악산의 관문이자 검문소, 숙정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하여 신분증과 함께 제출하면 출입 허가를 알리는 목걸이용
패찰을 준다. 물론 신분증도 돌려준다. 단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들어가지 못하
며, 입장시간(9~16시, 겨울은 15시까지)이 지나면 이 역시 출입이 불가능하다.

숙정문안내소를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가파른 길이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시작부터 힘든 길이니
북악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허나 다행히 북악산을 정비하면서 목조
계단길을 만들어 통행이 조금은 편해졌으며, 가파르기로 이름난 북악산 주능선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간단한 시험 수준이다.


▲  숙정문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이후)

▲  숙정문으로 오르는 계단길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北岳山, 백악산(白岳山)> -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아난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 관련글 보러가기)
,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 관련글 보러가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더불어 서
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자 이들의 맏형이다. 이들 4개의 산은 서울의 안쪽을 둘러싸
고 있어 내사산(內四山)이라 불린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의 능선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쌓았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
라 북쪽의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
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이렇게 도성을 만들고 한강 남쪽에 솟은 관악산(冠岳山, 629m)을 신하의 산이란 뜻의 조산(朝山
)으로 삼았는데, 문제는 주산인 북악산보다 훨씬 높고 산세가 우람해 거의 신하가 왕을 누르고
있는 형세였다. 게다가 관악산과 그 서쪽에 자리한 호암산(虎巖山)이 각각 활활 타오르는 불의
모습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서울을 응시하고 있는지라 조선 위정자들은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
환으로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서울을 지키는 진산(鎭山)으로 삼아 북악산을 보조
하게 하고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키도 높고 산세도 훨씬 장대하
기 때문이다.

북악산은 하얀 바위가 많아 원래 백악산(白岳山)이라 불렸으며, 종로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보
인다. 마치 제주도 어디서나 한라산(漢拏山)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상징하는 산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세웠
으며, 그 북쪽(지금의 청와대)에는 넓게 후원을 두었다. 지금은 청와대(靑瓦臺)와 국무총리공간
이 둥지를 틀고 있어 이 땅의 정치, 행정 1번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도성
의 북문인 숙정문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彰義門)이 고색의 모
습으로 고개 중턱을 지킨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로 해방 이후까지 주능
선과 북쪽 능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나 1968년 1.21 사건 이후 북악산 대부분
이 금지된 땅이 되고 말았다.

주능선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다.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堂)계곡 등이 흘렀으
며, 풍경이 매우 고와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風流)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삼청공
원과 숙정문 남쪽은 서울 여인들의 봄꽃놀이 장소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대은암계곡 바위글씨를
비롯해 당시의 여러 문화유적이 아련히 남아있으며,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백석동천
이란 별서(別墅)유적이 남아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무성하다보니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그들은 궁궐 후원과 북촌(北村)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가 호랑이
의 습격으로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또한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
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
당임)

1968년 이후 빗장을 철저히 닫아걸던 북악산은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
바위까지 부분 개방되었으며, 그것도 인터넷 예약을 통해 1일 4회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후 전
면 개방을 위해 쉼터와 의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2007년 4월 5일, 말바위부터 북악산 정상
을 거쳐 창의문까지 전 구간이 부분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북쪽 능선인 북악하늘길
(김신조루트)이 활짝 열려 시민의 품으로 돌아어왔다. 특히 이 길은 약간의 통제구역이 있긴 하
지만 제약이 심한 주능선과 달리 시간 제약이 없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좀 남아있다. 그 외에는 간간히
소나무가 목격된다. 또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있다보니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
이 원시림마냥 매우 울창하다.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수목이 무성
하여 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허파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과
북한산, 관악산과 더불어 대자연 형님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
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서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
민한 시설이 많으니 도읍을 옮기지 않는 이상은 개발의 칼질도 자유롭게 산을 범할 수 없을 것
이다.


▲  북악산 북쪽 산줄기 남마루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가운데 산줄기)

※ 북악산 주능선과 한양도성길
2006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개방된 주능선은 창의문에서 정상을 거쳐 말바위, 와룡공원으로 이
어지는 4.3km 구간으로 숙정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그외에는 절대 출입금지이다. 또한 탐방구간(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을 절대로 벗어나면 안
되며 도처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말바위안내소~말바위~
삼청공원/와룡공원 구간은 완전 개방된 구간으로 시간 제한 없음)

주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숙정문과 1.21사태소나무,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촛대바위
, 청운대 등이며,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널려 있어 북악산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실감케 한
다. 만약 서울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북악산은 꽤나 자유로웠을 것이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에서는 서울 도심이 두 눈 아래로 펼쳐져 조망(眺望)이 천하 일품이며, 숙
정문과 말바위에서는 성북동과 성북구 서북부 지역이 보이고, 한양도성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평창동(平倉洞)과 부암동, 인왕산, 북한산이 차례대로 보여 그야말로 움직이는 조망대이다.

※ 북악산 한양도성 찾아가기 (2015년 11월 기준)
① 창의문 안내소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하차, 창의문 옆에 바로 안내소가 있다.
② 숙정문 안내소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에서 하차, 도보 15분
③ 말바위 안내소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성대후문
   (와룡공원)에서 하차, 성북동 방면으로 3분 걸으면 한양도성이 있는 와룡공원이다. 여기서
   성곽 북쪽 자락길을 10분 정도 가면 말바위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나오며, 계단을 올라 서쪽
   으로 가면 말바위안내소이다. 또는 4호선 혜화역(1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
   고 명륜동 종점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이들 안내소는 주차시설이 없으며, 부근에 딱히 수레를 세울 곳이 없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
  하기 바란다.

★ 북악산 관람정보 (2015년 11월 기준)
* 북악산(한양도성) 입장시간은 9시부터 16시까지이며, 동절기(11~3월)는 10시부터 15시까지다.
  퇴장은 무조건 18시(동절기는 17시)까지 마쳐야 된다.
*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에 쉼) / 입장료 없음
* 탐방구간
① 창의문 ~ 북악산 정상 ~ 청운대 ~ 숙정문 ~ 말바위안내소 ~ 삼청공원/와룡공원/성북동
② 숙정문안내소 ~ 숙정문 ~ 청운대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창의문
* 북악산 탐방 유의사항
① 지정된 코스를 절대로 벗어나면 안된다. 잘못하면 총 맞을 수 있다.
② 탐방로 전 구간은 금연, 금주, 애완동물 출입 제한
③ 안내소(창의문, 숙정문, 말바위)에서 출입신고서를 작성해야 되며,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
   야 된다.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못들어간다.
④ 안내소 외에는 딱히 편의시설이 없다. 해우소는 안내소에만 있으며, 간단한 먹거리는 안내소
   주변이나 산길 곳곳에 마련된 쉼터에서 먹으면 된다.
⑤ 사진 촬영은 숙정문과 촛대바위, 청운대, 북악산 정상, 백악쉼터, 1,21사태소나무, 돌고래쉼
   터, 창의문에서만 가능하다. (그 밖에 장소는 곤란함)
* 문화유산 해설 : 3~11월까지 문화유산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매일 2회<10시(11월은 10시
  30분), 14시> 운영하며, 각각 말바위와 창의문을 출발하여 곳곳을 설명해준다. 별도의 신청은
  받지 않으며, 출발시간까지 집결지에 모인 탐방객에 한해 가이드를 해준다.
* 안내소 연락처 (북악산 한양도성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① 말바위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② 숙정문 (☎ 02-747-2152, 팩스 02-747-2153)
③ 창의문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한양도성의 북문이자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묶인 금지된 성문,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숙정문이 모습을 비춘다. 북악산 주능선에 자리한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으로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
문(敦義門)>과 함께 한양 4대문의 하나였다. 북대문(北大門), 북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도성의 대문이라기도 보다는 산성(山城)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강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1396
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崔揚善)이 태종
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
다'
건의하여 이들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허나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여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주변이 첩첩한 산주름 속이라 교통의
기능은 별로였다. 겨우 성북동과 북악산 북쪽 능선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성북동은 산
지에 선잠단(先蠶壇) 같은 국가 제단만 있었음>
그리고 평소 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다가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태종 16년)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
의 존재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더 컸던 것이다.

1504년(연산군 10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간판을 갈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했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
北靖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 일대가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루는 비록 새 건물이지만 성벽을 이루는
성돌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해 중후한 멋을 보인다.
매년 봄이 되면 서울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전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2006년부터 다시 속세에 개방되어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문 관람이 가능하다. 허나 문 좌우 성벽
과 숙정문안내소 방면만 통행이 가능하며, 남쪽에는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지만 금줄이
쳐져 있어 절대로 갈 수 없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부자 동네로 콧대가 드센 성북동 일대가 훤히 바라
보이며, 대자연이 스케치한 가을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 놓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자
아낸다. 다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여 조망은 크게 떨어진다.
(숙정문은 사적 10호로 지정된 '한양도성'의 일원임)


▲  숙정문의 수수한 뒷모습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숙정문
다른 성문과 달리 천정에 그림이 없다. 그냥 맨들맨들한 성돌만 보일 뿐이다.

▲  숙정문 동쪽 협문

▲  서쪽에서 바라본 숙정문 문루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동 지역
눈이 시리게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북악산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성북동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삼청각)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2) 울긋불긋 타오른 북악산 북쪽 능선
북악산길이 흐르는 북악산 북쪽 능선이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사진 왼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기와집이 북악산길의 상징인 북악팔각정이다.

▲  힘차게 뻗은 숙정문 서쪽 성벽
서울 수비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뭉쳐 단단한 성벽이 되었다.
성곽을 따라 북악산으로 오르면 시야에 범위도 점차 넓어진다.


 

♠  북악산 촛대바위와 청운대

▲  촛대바위

숙정문에서 서쪽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왼쪽에 촛대바위가 있다.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실은 바위의 북쪽과 동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
면 촛대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저 그런 바위로만 보인다.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정면인 남쪽
에서 봐야 되는데, 남쪽은 통제구역이라 발도 못들이게 하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바위 정상
역시 금지된 곳이니 괜히 바위 위에 올라타는 일이 없도록 한다.

촛대바위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
던 추악한 곳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의 정수리
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 땅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통치하려는 의도를 심
은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다.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길
나무 난간 너머와 바위는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촛대바위에서 청운대로 오르는 성곽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의 푸른 물결

▲  촛대바위와 청운대 중간의 성곽 바깥 길

촛대바위를 지나면 길의 경사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암문 밖
으로 나가서 곡장이라 불리는 높은 곳까지 성곽 바깥 길을 이용해야 되는데, 이는 성곽에 군대
시설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길을 낸 것이다.
길 옆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북한산, 평창동 등이 바라보여 마치 휴전선 너머의
미지의 땅을 보는 듯 하며, 저 길의 끝에 이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성곽길이 이어진다.


▲  청운대(靑雲臺) 표석 (해발 293m)

촛대바위에서 성 바깥, 안쪽을 들락거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에서 2번째로 높은 곳인 청
운대에 이른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의 지대란 뜻으로 근래에 붙여진 이름인 듯 싶다. 이곳은 공간이 넓고 의자
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두 발을 멈추고 쉬어가기에 좋으며, 북쪽으로 성북동과 북한산, 남쪽으
로 남산과 서울 도심이 바라보여 조망 또한 괜찮다. (도심 쪽이 괜찮음)


▲  소나무가 짧게 그늘을 드리운 청운대

▲  청운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

▲  여장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청운대를 지나면 안내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안내문에 따라 여장을 잘 살펴보면 글씨들이 희미
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들은 도성을 축조하면서 새긴 공사 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고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으로 이런 것이 새겨진 성돌이 한양도성에 여럿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성곽 전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
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해 지(地), 현(玄
)...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
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다. 이곳 성돌에는 의
령시면(宜寧始面)이라 쓰여 있어 의령(경남) 시작 지점을 뜻한다.


▲  남북분단의 쓰라진 비극 - 1,21사태 소나무

청운대를 지나면 성돌 글씨와 함께 1.21사태 소나무라 불리는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북악산하
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68년 김신조 공비 패거리의 서울 침공 사건인 이른바 1.21사태로
그들과 총격전을 주고 받은 현장이다. 북악산에는 그와 관련된 쓰라린 장소가 많은데, 이 소나
무와 호경암이란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호경암이 있는 북쪽 능선에는 김신조 일
당이 도망쳤다고 전하는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가 있다.

때는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임진강을 건너 파주와 양
주의 여러 산과 북한산 서쪽 자락, 창의문을 거쳐 1월 21일 도심까지 용케 들어온 김신조 패거
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淸雲洞)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
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경찰이 검문을 한다며 그들의 길을 막자 공비들은 순간 발작하여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총을 꺼
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지고 '끝까
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으
로 만들었으며,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
행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소나무 부근에서 격전이 일어나 15발이 나무
에 박혔다.

이후 북악산 북쪽 능선인 호경암에서 격전이 있었고,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끝에 김신조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은 북한까지 도망을 쳤으며, 토벌된 공비의 시신
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신조는 투항해 이 땅 어딘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김신조 일당의 난입 사건을 1.21사태라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단단히 뚜껑이 폭발한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작전도로인 북악스카이웨이를 콩
볶듯 급히 닦게 했다. 예비군 창설로 인해 이 땅의 남자들은 군제대를 하고도 8년이나 예비군훈
련을 받아야 되는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북악산에 널린 수많은 소나무의 하나이지만 이제는 북악산의 명물로 단단히 자리매김을 하였다.
허나 좋은 뜻에서 그리 되면 모르지만 호경암과 함께 1.21사건 같은 우울한 사건으로 명물이 된
것이니 소나무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 없는 소나무로 조용히 묻히는 것
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안좋은 쪽으로 명물이 되었는지 참. 나무나 사람이나 운과 시간을
잘 만나야 된다.
게다가 호경암처럼 당시에 총탄 흔적까지 진하게 안고 있으니 서로 총을 겨누며 대치하는 남북
분단의 비정한 현실을 전율이 일도록 안겨주는 유쾌하지 못한 곳이다.


▲  1,21사태 소나무의 총탄 흔적
그때 총탄이 박힌 자리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흉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에 박힌 바위

청운대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마루는 해
발 342m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악산 정상은 청운대보다 공간이 조금 넓으며, 정상 중앙에
는 백악산의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 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
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 정상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지정된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절대로 안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
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 동쪽으로는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가히 천
하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저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세계 최대의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이곳만
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서울 도심을 둘러싼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고 오랜 세월 서울 땅
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에서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앞다투어 바라보인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정상부는 대머리처럼 아무 것도 없고, 그 주변에 소나무와 여러 식물을 심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 부자 동네 평창동이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 너머로 은평구, 서대문구 등의 서울 서북부 지역과
서울/고양시 경계를 이루는 산들이 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늦가을 오색 단풍의 물결이 부암동 일대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이만큼
이나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
함마저 일 정도이다. 반면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저걸 어떻
게 올라가나 정말 까마득하다. 거의 30~40도 경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길 권한다. 어차
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지만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을
위해 만든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 북쪽 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백악쉼터에서 창의문 방향)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백악쉼터 성곽 너머로 바라본 천하
북악산 북쪽 줄기와 북한산, 평창동과 부암동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왜 북악산과 전혀 관련도 없는 돌고래
를 쉼터 이름으로 삼았는지 아리송했으나 그곳에 가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바로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 그 이름도 원래부
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돌고래라고는 하지만 내 눈에는 물개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
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
는 모습과 같은데,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 뿐
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봐야 되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
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북악산의 서쪽 종점이자 옛 한양도성의 성문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紫霞門)> - 사적 10호

▲  창의문 바깥쪽 (부암동 쪽)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지만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서울 도심과 부암동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에 있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그
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리나 유
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  창의문 안쪽 (도심 쪽)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
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
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광해군 9
년) 창덕궁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으며,
성 밖 부암동에 귀족들의 별장과 놀이터가 즐비했고, 부암동을 드나들던 귀족들이 많은 점으로
볼 때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귀족들의 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
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
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반정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래서 문루에는 인조반
정(仁祖反正)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영조 17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
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
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여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夾門)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도
아마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  문루에 자랑스럽게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기분같아서는 저 현판을 떼서 장작으로 쓰고 싶다.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
(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성에 안차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마저 몽땅 말아먹게 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와 성
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반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 중
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0월 문화재
청에서 국가 지정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절차를 거쳐 별다른 일이 없는
한 11~12월 중에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과 서울 도심
이곳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공비들이 침투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도성 성문의 하나로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
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들로 심심치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
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東
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
은 어렵다. 또한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문루에 올라
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
가지가 있다.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꽃
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
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동 지
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을 가만
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다. 허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의 모
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
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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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1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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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5/11/26 19:46 | 서울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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