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에서 제일 오래된 불상 ~ 불곡(부처골) 석불좌상

 

♠  경주 남산에서 제일 오래된 불상 ~ 불곡(부처골) 석불좌 ♠
남산
*  이글루스 블로그는 문장 배열이 엉망이라 읽기가 조금 힘들 수 있습니다.
아래 다음블로그 글을 참조해 주세요.
http://blog.daum.net/snowlove78/13756868


보리사 입구인 갯마을에서 2차선으로 포장된 남천(南川) 둑방길을 따라 북쪽(경주시내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탑곡마애조상군을 간직한 불무사(옥룡암)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7분을 더
가면 불곡석불좌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그네를 맞는다. 여기서 남산으로 접어들어 부처골(
불곡) 개울을 10분 가량 거슬러 오르면 부처골의 은인(隱人), 불곡석불좌상 앞에 이른다.

부처골에는 2개의 절터가 있으나 주춧돌과 깨진 기왓장만이 어지럽게 뒹굴 뿐, 별다른 것은 없다.
계곡은 작지만 숲이 무성하고 인적이 별로 없어 개울에 발을 담구며 조용히 쉬어가기에 제격이다.
또한 부처골 석불 아래로 대나무 밭이 무성하여 청명한 기운이 석불을 찾은 중생을 엄습한다.


▲  부처골 입구

▲ 대나무 사이로 친환경적인 터널을 뚫어 산길을 내었다.

◀  불곡석불좌상을 알리는 도깨비 기와
이정표


딱히 조명시설도 없는 이곳을 밤에 찾아온다면
저 도깨비에 기겁하여 줄행랑을 칠 것 같다.
허나 가까이서 보면 무섭다기보단 미소가 만면
에 흐드러져 손으로 쓱쓱 어루만지고 싶은 귀
여운 표정이다. 부처골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를 보고는 자신의 소임도 잊고
되돌아 갈 것이다.


♠  부처골의 은인(隱人), 남산에서 제일 오래된 고졸한 불상 ~
불곡 석불좌상(佛谷 石佛坐像 = 부처골 석불좌상) -
보물 198호

불곡석불좌상은 삼국시대가 그 끝을 맺던 7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이다. 남산에 뿌리를 내린 불상
중 가장 연세가 지긋한 것으로 전해지며, 남산에서 불곡석불처럼 676년 이전, 이른바 고신라(高
新羅) 시대에 지어진 불상으로 배리(排里)3존석불과 삼화령 애기부처 등이 있다. (배리3존석불이
불곡석불보다 연세가 더 많다는 의견도 있음)

높이 3m, 폭 4m 정도 되는 바위에 높이 1.7m, 폭 1.2m, 깊이 0.6cm 정도의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돋음새김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석불의 높이는 1.4m로 바위에 새겨진 것이니 마애불(磨崖佛
)로 봐도 지장은 없다. 바위 안에 다소곳이 들어앉아 흐르는 세월을 즐기는 석불은 거의 석굴(石
窟)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신라 석굴사원의 옛 양식을 보여준다.

바위에 굴을 파고 들어앉은 탓에 비바람과 세월의 거친 흐름을 피할 수 있었으며, 1,400년에 세
월에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상처라고 해봐야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에 조금 깨진
상처가 전부이니 그의 건강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약간 고개를 숙인 둥그런 얼굴에는 수줍은 듯 그만의 특유한 미소가 엿보인다. 홍예처럼 구부러
진 눈썹 밑으로 지그시 감겨진 두 눈이 있으며 코는 오목하다. 머리 위로는 육계(= 무견정상)가
두툼하게 솟아 있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두 무릎과 다리를 덮고 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어 앉아있는 모습은 인자함이 깃든 할머니
의 모습처럼 편안하게 다가와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에게 다가서면 멀리서 왔다며 떡이
나 밥, 노잣돈을 두둑히 안겨주지는 않을까? 무릎은 상체에 비해 조금 낮고 오른쪽 발은 지나치
게 크게 표현되어 약간의 옥의 티를 선사한다. 그가 앉아있는 자리는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로 여겨진다.

불상 앞에는 제물을 올리는 네모난 돌이 있는데 누가 바쳤는지 노란 참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참외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석불, 저걸 어떻게 먹을까? 언제 먹을까? 궁리하는 것 같아 나
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곳은 남산을 오르는 길목으로 등산객과 답사객이 드문드문 지나가며 치 성을 드리러 오는 부녀
자들만 간혹 발걸음을 할 뿐 인적이 드물다. 예전에는 그를 관리하는 절이 주변에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홀로 남아 부처골(불곡)석불좌상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처골이란 이름은 이 불
상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 불곡석불좌상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
신라 32대 군주인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5년(697년) 어느 날, 왕은 남산에 있는 어느 절
의 축성식에 참석하여 공양을 올렸다. 그때 허름한 차림의 승려가 제식에 참여시켜 달라고 간청
을 하였다. 왕은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탐탁치 않은 얼굴로 제일 끝에 서도록 허락했다. 의식을
올린 왕은 그 승려를 불러
"그대는 어디에 사는가?"
그러자 승려가 "소승은 남산 비파암에 있습니다"
왕은 조소를 띄우며 "돌아가거든 짐(朕)이 임석한 제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승려가 답하길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폐하께서도 환궁하시거든 진신석가를 공양했다는 말씀
은 하지 마시옵소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려의 몸에서 금빛이 나며 등뒤로 광배(光背)마냥 광채가 발하는 것이
다. 그러더니 땅 위에서 스며 오르는 구름을 타고 비파암 쪽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왕은 몹
시 당황해하며 급히 사람을 보냈으나, 그의 뒤를 간신히 따라잡았을 때는 비파암 언저리에서 지
팡이와 가사(袈裟)를 버리고 바위 속으로 숨어버린 뒤였다. 왕은 깊히 뉘우치며 바위 부근에 절
을 짓고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불상이 불곡석불좌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니까 ~~

※ 불곡석불좌상 찾아가기 (2009년 7월 기준 / 서울 기준)
① 대중교통

* 서울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종합터미널), 대구(동대구고속터미널, 동부정류장), 울산, 포항에서 경주행 버스가 자주
  다닌다.
* 서울역과 영등포역, 대전역에서 경주행 열차가 1일 7회 떠나며 청량리역에서 심야열차가 매일
  21시에 떠난다.
* 동대구역과 부전역, 울산역에서 경주행 열차가 10여 회 운행한다.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에서 경주시내/좌석버스 11번을 타고 갯마
  을에서 내린다.
* 불국사나 보문단지에서 갈 경우는 경주시내/좌석버스 10번을 타면 된다.
* 갯마을에서 남천둑방길을 따라 시내 방면으로 15분 정도 걸으면 불곡석불좌상을 알리는 이정표
  가 나온다. 그것을 따라 10분 정도 들어간다.
② 승용차 (부처골 입구에 주차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상서장을 지나 고운교 직전에서 우회전 → 부처
  골 입구
* 울산 → 경주 방면 7번 국도 → 통일전입구 3거리에서 좌회전 → 통일전 앞에서 우회전 → 화
  랑교 못미쳐에서 남천둑방길로 좌회전 → 부처골 입구

★ 불곡석불좌상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음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산56


▲  부처골 계곡에 잠시 내려놓은 나의 짐들

부처골 석불을 친견하고 내려오는 길에 대나무숲
너머 계곡에서 여름제국의 핍박도 벗어날 겸 잠
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즐겼다.

장맛비가 내린 탓에 날씨가 무척이나 찐다. 등산
로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이라 인적도 없어 과
감하게 웃통도 벗어 던지며 냉수마찰도 하고 발
을 담궈 책도 읽고, 자연과 대화(?)도 하면서 나
만의 극락세계를 연출했다. 하긴 별게 극락인가?
이런 것이 바로 극락이지..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나만의 공간에서 내 의지대
로 머문 1시간의 시간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
었다.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 정말 이런 것인가
보다. 기분 같아서는 더 머물고 싶었지만 속세에
벌려 놓은 일(?)이 많아서 이만 자리를 접고 나
와야 했다.


부처골(불곡) 석불좌상을 끝으로 동남산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동남산을 이루는 골짜기는 부
처골과 탑골, 미륵곡 외에도 왕정골, 장창골, 식혜골 등이 있으며 이들은 나중에 인연이 된다면
모두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다시 갯마을로 나와 망덕사(望德寺)터로 가기 위해 남천을 건너 흙길의 둑방길을 따라 남쪽으로
걷는다.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남산의 동쪽을 부드럽게 돌아 형산강(兄山江)을 거쳐 동대해(東大
海)로 흘러가는 남천, 옛날에는 갯마을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삐쩍 말라버려 정말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드넓은 배반평야를 옆에 끼며 온갖 수풀과 들꽃이 손짓하는 남천(南川) 뚝방길은 나를 망덕사터
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인도했다. 물론 평야 너머로 보이는 높다란 언덕배기에 망덕사터 당간지
주(幢竿支柱)가 보이긴 했으나, 평야를 가로지르는 길이 나타나질 않아 계속 뚝방길만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7번 국도와 능마을이 나타난다. 수레의 왕래가 잦은 국도 너머로 육중한 덩치의 신
문왕릉이 강하게 시선을 던진다. 그래서 망덕사터는 제쳐놓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여름이 머무는 남천 둑방길
가까이에 보이는 산이 바로 남산의 동쪽, 동남산이다.


♠  삼국시대를 마무리하고 후기 신라로 접어들면서 국내외의 혼란을 잠재우고
전제왕권 강화로 신라의 막바지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신문왕의
왕릉으로 전하는 고분, 전 신문왕릉(傳 神文王陵) -
사적 181호

경주시내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불국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사천왕사(四天王寺)터를 지나 길 왼쪽
에 숲동산을 이룬 커다란 능, 신문왕릉이 보일 것이다. 왕릉은 동그란 모습에 흙을 쌓아 만든 원
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높이는 7.6m에 이르며, 지름은 29.3m, 둘레는 대략 70m 정도 된다. 능
을 받치는 석축(石築)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았고 그 위에 갑석을 둘렀으며 그
런 석축을 지탱하기 위해 44개의 튼튼한 호석을 주변에 둘렀다.

신문왕 이전 신라 무덤은 원형봉토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2지신상을 두른 진덕여왕릉(眞
德女王陵)과 김유신(金庾信) 묘가 있긴 하나 그들의 능인지도 확실치가 않다>
그러다가 신문왕릉
부터 능의 밑부분에 석축을 쌓고 호석을 두르는 형태가 나타났으며 2대 이후인 성덕왕릉(聖德王
陵)부터는 호석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기고 난간석을 두룬 형태로 업그레이드 된다. 즉 신
문왕릉은 동그란 흙무덤에서 12지신상을 갖춘 신라 후기 무덤 양식으로 넘어가는 중간단계로 그
의미가 크다.


▲  신문왕릉의 정문 ~ 홍례문(弘禮門)

▲  왕릉 앞에 펼쳐진 소나무의 향연 ~ 멋드러진 소나무 3그루


왕릉으로 들어서려면 홍례문이라 쓰인 삼문(三門)을 지나야 된다. 가운데 문은 제사 외에는 열릴
일이 없고, 보통은 우측문만 열려 있다. 홍례문 앞에는 주차장이 있고 허름한 가게가 하나 있을
뿐이다.

홍례문을 지나면 운치가 서린 소나무 3그루가 답사객을 맞이한다. 소나무의 모습은 능 주인의 혼
령이 깃들여서일까? 그 모습이 결코 예사롭지가 않다. 문과 가까운 소나무는 무려 3갈래로 가지
를 뻗어 자라났으며 제왕에 대한 예를 표하듯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푹 고개를 숙인
형태로 신비로움을 가득 자아낸다.

드넓은 묘역에는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시원스런 느낌을 선사해 주며 석축을 두른 거대한 왕릉은
전제왕권과 죽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지키려고 했던 망자(亡者)의 부질함이 고스란히 담
겨져 있다. 저 무덤을 만들고자 얼마나 많은 신라 백성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했을까? 아무리 제
왕이라고는 하지만 1명의 사후 공간 치고는 너무 넓은 것 같다.

능 앞에는 제사를 지내는 거대한 석상(石床)이 있는데 성덕왕릉의 석상에 비해 얕고 석재가 고르
지 못해 원래의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갖다놓은 것인지 의심스럽다.


▲  왕릉 앞에 차려진 커다란 석상


능 주변을 가득 메운 44개의 호석은 덩치가 나보다 크다. 무덤이 크니 호석도 자연 클 수 밖에는
없는데 호석에는 세월의 때가 가득 끼어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다. 다만 신문왕 이후부터는
12지신상이 그 허전함을 메워주기 시작한다. 거대한 언덕이나 다름없는 왕릉에는 풀과 들꽃의 세
상이 펼쳐져 있다. 여름에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꽃송이의 마가렛(나무쑥갓)이 가득하여 마치 눈
송이가 아른거리는 듯 하다.


▲  신문왕릉 호석

신라의 왕릉은 5릉과 무열왕릉, 성덕왕릉, 흥덕
왕릉, 경순왕릉 등을 제외하고는 무덤의 주인이
아리송하다. 이는 조선 후기에 신라 왕족의 후
손인 경주 김씨와 박씨, 석씨 집안에서 옛 기록
을 멋대로 해석하여 그럴싸한 옛 무덤을 그들의
조상 묘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 이름 앞
에 보통 전(傳)을 붙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문왕이 붕어하자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허나 지
금의 신문왕릉은 낭산 남쪽에 있어 기록과는 전
혀 틀리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에는 효소왕(孝昭王)의 능이 망덕사 동쪽에 있다
고 하는데 그 위치가 딱 이곳에 해당된다. 그래
서 이곳을 효소왕릉으로, 낭산 동쪽 황복사지(皇
福寺址) 부근의 십이지석(十二支石)을 지닌 폐왕
릉(廢王陵)을 신문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답답하기는 매 마찬
가지다.


※ 신문왕(神文王 ? ~ 692 <재위 681 ~ 692>)


신문왕은 신라 31대 군주로 휘(諱, 제왕의 이름)는 김정명<金政明, 혹은 김명지(金明之)>, 자는
일초
(怊)이다. 문무왕의 큰 아들로 어머니는 자의태후() 김씨이며, 문무왕 4년(665년)
태자(太子)로 책봉되어 681년 7월 제위에 올랐다.

제위에 오른 그 다음달, 장인 김흠돌()이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키자 장인을 비롯한 반
역 가담자를 모두 처단하고 왕비 김씨를 쫓아냈다. 이를 토대로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 모반을
평정하자 보덕국(報德國, 전북 익산) 왕 안승(安勝, 고구려 왕족)은 사신을 보내 머리를 조아리
며 평정을 경하했다.

682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 신라의 시조를 모신 신궁)에 제사하고 사면령(赦免令)을 내려
죄수를 방면했다. 여름에는 위화부령() 2명을 두어 선거() 사무를 맡게 했으며 6월
에 국립학교인 국학(國學)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다.

683년 5월 김흠운()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왕비<신목왕후(新穆王后)>로 삼았으며, 10월 보
덕국왕 안승을 소판(蘇判, 3등급의 고위 관직)으로 삼아 경주에 머물게 하고 김씨 성을 내렸다.

684년 11월, 안승의 족자() 대문()이 금마저(渚, 전북 익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때려잡고 그 땅을 금마군()으로 삼아 그 지역 백성들을 남쪽으로 이주시켰다.

685년 봄,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와 서원경(西京, 충북 청주)을 설치했으며, 봉성사(

)와 망덕사()가 완성되었다.

686년 당나라에 예기와 문장을 청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관련서적 50권을 보내주었다.

689년 정월, 관리들에게 주던 녹읍()을 폐하고 해마다 조곡(穀)를 녹봉으로 주기로 했다.
(우리나라 사회경제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 9월에는 서원경(청주)에 성을 쌓고 달구
벌(達句伐, 대구)로 서울을 옮기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691년 3월 왕자 이홍(理洪)을 태자로 봉했으며, 사화주(沙火州, 경북 상주)에서 흰기러기를 진상
했다.

692년 당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무열왕(武烈王, 신문왕의 친할아버지)의 묘호(廟號)를 왜 태종
(太宗)이라 했는지를 따졌다. 그 이유는 당나라 2대 황제 이세민(李世民)의 묘호가 태종인데 신
라가 마음대로 남의 묘호를 따붙였다는 것이다. 이에 신문왕은
'무열왕의 공과 덕이 커 태종이란
묘호가 충분하다'
답을 하니 당나라는 더 이상 항의하지 못했다. 그해 7월 왕이 붕어하자 시호(
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 태자 이홍이 그 뒤를 이으니 바로 효소왕
이다.

신문왕 시절의 신라는 당나라와 왜국(倭國)과 빈번하게 교류를 하였고 설총(薛聰)과 강수(强首)
등의 대학자가 등장하여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 신문왕릉 찾아가기 (2009년 7월 기준)
① 대중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에서 입실, 모화 방면 600번 계열 시내버스
  를 타고 능마을 하차 (길가에서 바로 보임)
② 승용차 (왕릉 앞에 조그만 주차장 있음)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배반4거리에서 불국사, 울산 방면으로 우회전
  → 사천왕사터를 지나 3거리에서 옛 국도로 좌회전 → 신문왕릉

★ 신문왕릉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9시에서 18시까지 (겨울은 17시)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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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09년 7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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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09/07/24 14:48 | 경북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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