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무계원, 안평대군집터, 청계동천...)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산책
(인왕산 자락 명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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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 반계 윤웅렬 별장의 뒷모습

▲ 부암동 무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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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누님이 그의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며 천하를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후배 여인네와 함께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종로구 부암동을 찾았다.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王山)에 포근히 감싸인 도
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천하 제일의 큰 도시로 콧대가 매우 높은 서울의 심장부에 자
리해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
도로 매우 번잡한 시내가 연상되는 도심과는 전혀 다른 산골마을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
서울 도심의 또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곳은 아름다운 경관과 도심과 가까운 잇점으로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밖 경승지로 격
하게 찬양을 받아와 그와 관련된 오래된 명소가 많이 서려있다. 이들 명소와 부암동의 수
려한 풍경에 나는 그만 퐁당퐁당 빠져버렸고 매년 적지 않게 찾아와 그에 대한 마음을 표
현한다.

부암동에는 고색의 명소, 현대 명소, 자연 명소 등 볼거리가 상당하여 본글에서는 인왕산
자락에 안긴 명소 몇몇만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부암동은 붙임바위에서 유래된 이름으
로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을 겸하고 있으며, 법정동인 신영동(新營洞)과 홍지동(弘智洞) 등
을 관할하고 있다.


♠ 부암동의 새로운 문화체험 공간, 고급 요정으로 악명을 떨친 옛 오진암
건물로 새롭게 재생된 ~~~ 무계원
(武溪園)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문로5길' 골목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로 격하
게 주목 받고 있는 무계원이 모습을 비춘다.
무계원은 한옥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최근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집처럼 보이겠지
만 실상은 100년 이상 묵은 한옥, 오진암을 가져와 지은 것이다. 부암동을 지겹게 들락거린 본
인 역시 그의 존재를 처음 보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13년 겨울 이전에는 없던 존재였기 때문
이다.

이 한옥은 서화가(書畵家)로 유명한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1896~1973)이 1910년에 지은 고
래등 기와집으로 원래는 종로구 익선동(益善洞, 종로3가 북쪽)에 있었다. 규모는 700평으로 여
기서 그의 많은 글씨와 그림이 탄생했다. 특히 사군자 중 난과 죽을 잘 그렸으며, 서화 감식에
도 매우 밝았다.
1953년 집을 조모씨에게 팔았으며, 조모씨는 이곳을 요정(料亭)으로 손질하여 장사를 했다. 이
집이 바로 이 땅 최초의 요정이자 서울시에 등록된 음식점 1호인 오진암(梧珍庵)인 것이다. 오
진암이란 이름은 뜨락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진암을 시작으로 청운각과 대원각, 삼청각 등의 요정이 서울 도심과 성북동(城北洞)에 생겨
났으며, 이들과 함께 1960~80년대 요정 정치의 산실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흔히 서울 3대 요
정으로 삼청각(三淸閣), 대원각, 청운각을 꼽으나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한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과 논의하여 그 유명한 7.4남북공동성
명을 이끌어 낸 현장이기도 하며, 권력 실세와 고위 관료, 기업인들이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
름만 대면 이 땅의 사람들이 거의 알만한 사람들이 이곳 단골이었다. 이후락도 오진암의 단골
로 많이 재미를 봤다고 한다.
또한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늘자 당시 미국 등 철없는 양이(洋夷) 언론들은 이 땅의 요정들
이 기생 관광으로 돈을 번다며 꼬집었고, 그때 오진암이 진하게 언급되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어느 손님이 290만원을 카드로 결제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며, 이곳 음식은 맛이
좋고 정갈한 편으로 접대 아가씨들이 매우 친절했으나 대신 가격이 후덜덜한 수준이라 100만원
이상은 훌쩍 넘어간다. 그래서 서민들은 얼씬도 하지 못한 그야말로 있는 자, 권력층의 폐쇄된
공간이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급 요정도 대거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원각
은 절로 탈바꿈해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가 되었고,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수해
고급 문화공간이 되었다. 청운각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으며, 오진암은 그들보다 더 오래
버티긴 했으나 손님이 줄면서 주인 조모씨는 결국 2010년에 집을 내놓고 말았다.
이곳을 사들인 사업자는 10층짜리 관광호텔을 짓고자 그해 9월 오진암을 밀어버렸는데 오래된
한옥이고, 20세기 중반 요정/풍류문화가 깃든 현장이라 철거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으나 종로
구에서는 개인 집이고 지정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집이 가루가 될 때까지 방관하고 말았다.
다행히 늦게나마 철이 든 종로구는 2010년 10월 호텔 사업자와 협의를 벌여 오진암을 다른 곳
으로 이건(移建)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 철거된 목조 자재를 모아두며 시
간을 허비하다가 2012년 2월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터 아랫쪽 지금의 자리를 마련해 복원
하기로 했다.
복원 비용은 종로구와 호텔사업자가 부담했으며, 정부에서 건네준 한옥건축지원금을 포함해 23
억이 소요되었다.

2012년 2월 복원 공사를 벌여 2013년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오진암에서 옮겨온 목재와 안채의
지붕기와, 서까래 기둥 등이 활용되었고, 특히 종로 청진동(淸進洞)에서 발견된 500년 이상 묵
은 건물 주춧돌로 석축을 쌓아 오진암을 그런데로 재현했다. 또한 뛰어난 장인들이 많이 참여
했고 (주)이건창호에서 한옥 화장실을 지어 기증했다.
공사가 완료되자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이 무계정사터의 일부임을 내세워 그곳과 연관지어 한
옥의 이름을 정하자고 요청했다. 하여 고심 끝에 무계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2014년 3월
20일 세상을 향해 활짝 사립문을 열었다.

무계원은 대지 1,654㎡, 연면적 389㎡로 안채와 행랑채, 사랑채, 연못, 돌담, 대문을 두었는데,
들어앉은 지형상 예전 오진암보다는 작게 재현되었으며, 분실된 예전 건물의 부재가 많아 기둥,
건물벽은 거의 새로운 것으로 채워넣었다. 그러다보니 새 집 냄새가 다소 진한 것이다.

다시 태어난 무계원은 전통문화체험 공간으로 개방해 인문학강좌, 서당체험, 다도교실, 국악공
연, 기획전시 등 다양한 전통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종로구와 안견기념사업회가 2016년
5월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의 예술혼을 기리고 그 유적 복원을 위하여 '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를 열기로 했다. (저번 10월에는 황제를 위한 콘서트가 매 주말에 열리기도
했음)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이자 꿀단지로 원래 자리도 아니고 이전 과정에서 고색의 내음도 거의 시
들었지만, 권력층과 돈 있는 자의 공간이 시민들의 공간으로 거듭난 의미 깊은 현장이며, 인근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집터)와 반계 윤웅렬별장, 청계동천 등 숙성된 오랜 명소와 같이 둘러보
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전통문화 및 교육 공간으로 쓰는 것보다는 사랑채나 안채 정도는 한옥 체
험 겸 숙박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문에 걸린 파란색 무계원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을 부리는 것 같다. '武'자는 꼭 칼질을 하는 것 같고,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로 인도하는 계단이 나온다.

▲ 무계원 행랑채와 전통 굴뚝

▲ 안채에서 바라본 행랑채


▲ 'ㄱ'자 모습의 안채
안채와 행랑채는 모두 'ㄱ'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옛 오진암의 냄새는
거의 없고 근래 새로 지은 한옥 냄새만 가득하다.

▲ 안채 뒷쪽 돌담과 돌로 단단히 다진 석대(石臺)
청진동에서 가져온 조선시대 건물터 석축과 새로 얹힌 하얀 피부의 석축이
어색하게 대비를 이룬다.

▲ 사랑채 통로

▲ 아무도 없는 사랑채 방


▲ 'ㄱ'자 모습으로 이루어진 사랑채 (밑층은 무계원 사무실)

▲ 사랑채 뒷모습과 네모난 굴뚝
굴뚝을 뜨겁게 달구던 연기는 온데간데 없고 차갑게 식어버린 장식용 굴뚝만
멀뚱히 솟아있다.

▲ 무계원 뒷뜨락 (사랑채 동쪽)
건물을 짓고 남은 동쪽 짜투리 공간은 뒷뜨락으로 삼았다. 이곳에는 나무와
조그만 화초 등을 심었으며, 뜨락 끝에는 굳게 잠긴 협문이 있다.

▲ 뒷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새집 냄새가 가득한 무계원은 딱히 오래된 볼거리나 특별한 것이 없어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미련없이 대문을 나섰다.

※ 무계원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버스가 내려간 방향(북서쪽)으로 조금 가면 길 건너편에 부암동주민센터가 있
으며, 그 옆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2분 (찾기는 쉬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추석 연휴는 쉰다)
* 입장료는 없으며 단체 관람시 사전 예약 요망
* 전통 공연과 전통문화체험, 기획전시, 인문학강연 등이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자세한 일정
은 무계원에 문의)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27 (창의문로5가길 2 ☎ 02-379-7131)
* 무계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연꽃이 한참 와신상담을 벌이고 있는 네모난 석조 연못
사랑채 뒷쪽에 자리해 있는 것으로 오진암 시절부터 있던 연못인지는 모르겠다.


♠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서린 곳
무계정사
(武溪精舍)터(안평대군 이용 집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무계원에서 다시 골목길(자하미술관 방면)을 1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마
중을 한다.
그 표석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왼쪽을 계속 주시하면 커다란 나무를 간
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옆에 커다란 바위가 고개를 들고 있다. 바로 그 바위에 '무계
동'이란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그곳이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인 무계정사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타고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등, 문무(文武)와 예술을 두루 갖춘 팔방미인으로 세종의 18명 아들
중에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불과 11살의 나이로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
하고 1430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유학 공부를 했다.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하기도 했다.

세종이 승하하자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한 인물 중
에서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황보인(皇甫仁), 김
종서(金宗瑞)와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자신의 세력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그는 창의문 너머 지금의 자리에 넓게 별장을 지었는데, 그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았다 하여 무계동
(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라 하
였다. 원래 이곳은 그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별장을 짓자 장정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고 훈련을 시키며 자신의 사병을 키워나갔으며 용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길렀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 손아귀에 있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玉)에게 무기를 지원 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 황표정사를 회복시켰으나 이는 그의 명을 단축시키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의 무력
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과 황보인
을 순식간에 처단하고, 방심하고 있던 안평을 포박되어 강화도로 유배보냈다.
허나 수양은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질 않는지 다시 강화도 서쪽에 자리한 교동도(喬桐島)로 쫓
아냈고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세상에서 제일 쓴 약, 사약(死藥)을 보
내 빨리 죽을 것을 재촉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 사발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선수를 당
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와장창 토하고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이후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년(1747년)에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
金在魯)의 건의로 그제서야 복관이 되고 시호를 받았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완전 쑥대밭이 되었으며 그의 권력을 향한
강인한 정열이 느껴지는
'武溪洞' 3글자만이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안평의 집터였음을 아
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
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담정으로 문인들을 초청하여 수시로 연회를 베풀었고, 궁중에 소장된 서화(
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명나라 서화를 연구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이를 소개하는 등 그 당시 문
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조선에 온 명(明)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는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
며 서로 글씨를 받아가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평화로운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
억 속에 두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
게 하니 그는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여 올렸다. 그것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바다 건너 왜열도에 가 있으며, 2009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
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의 현장인 무계정사터를 찾는 답사객이 잠시나마 늘기
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
子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
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등의 비문이 있다.


'武溪洞' 바위글씨가 있는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예전에는 개인 소유
였으나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하여 빈 집이 되었다. 집과 바위글씨 주변은 나무들이 여럿
있을 뿐, 거의 방치되고 있는 수준이며, 서남쪽은 너른 공터가 있는데, 그곳은 현진건의 집터
이다.

10여 년 전 무계동을 찾았을 때는 쥐방울만한 견공(犬公) 2마리가 요란을 떨며 바위를 지키는
통에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글씨를 봤었는데, 이제는 그들도 무계정사처럼 희미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2007년 이후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집터'로 변경되었으며, 집
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화관광과
연락처로 연락을 하거나 요령껏 넘어가기 바란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5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
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창의문로7길 28-4)


▲ 무계동 바위글씨로 인도하는 조그만 골목길
낙엽이 쓸쓸히 내려앉아 만추(晩秋)의 서정을 불러 일으킨다.


▲ 공터가 되버린 현진건 집터
저 뒤쪽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구석에는 은단천(銀丹泉)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한줄기 신기루가 되어 사라진 '현진건 집터 표석'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문인이다. 그는 1930년대에 무계정
사터인 이곳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았는데, 2000년 이후 개발의 칼질을 당해 사라졌다. 그래도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문화유산이나 기념물로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
효석(李孝石) 생가처럼 조촐한 문학의 성지(聖地)로 키웠으면 좋았을 것을 위정자들의 철학과
역사의식 부재, 그리고 그들을 등에 업으며 오로지 돈을 위해 마구잡이로 칼질을 일삼는 개발
업자들, 그들이 날뛰는 이 땅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글씨를 지닌 바위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인왕산의 품으로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기분이다. 산골에 있어 다소
오르막길이 많긴 하지만 그리 힘든 정도는 아니다.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앞다투어 베푼
숲내음에 걷기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지며 온갖 감상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한때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
글씨는 작고 얇은 수수한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새겨놓은 것이다. 이름 그대
로 맑고 깨끗한 계곡이 있었다는 뜻인데, 지금은 그 계곡이 사라져 실감이 나지 않지만 윤웅렬
별장 뒤쪽에 가늘게 흐르는 계곡이 이 앞을 흘러갔다. 그러다가 주택을 만들고 길을 내면서 지
하에 생매장된 것이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조선 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바위 주변이 개인 소
유 땅이라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코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어차피 길
가에 있고 훤히 다 보이기 때문에 관람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한옥,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 친일파의 하나인 윤웅렬(尹雄烈, 1840
~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
忠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과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열도를 시찰하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설
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다. 허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
亂)으로 왜열도로 도망쳤다가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지자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
나 3일 천하로 싱겁게 끝나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군부
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라 상해(上
海)로 줄행랑을 쳤으며, 다시 기들어와 1906년 많은 돈을 들여 부암동에 별장을 짓고 머물렀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왜국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심히 좋지 않은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아들로 그 유명한 이름,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는데, 그는 개화파 지식인으
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민중 계몽
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교
육에 헌신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서서히 친일파로 갈아타면
서 부친과 마찬가지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이 이곳에 별장을 지을 때,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가 골로 가면서 3째 아들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
채, 광채, 문간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
고,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
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앞서 언급한 청계동
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사랑채 지
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 도성 밖 부암동에 세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도 두고 집채만한 큰 바위도 두면서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0
년 이후 어느 기업 회장이 인수하면서 2011년 가을에 크게 보수를 했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
들고 담장을 추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다.
집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폐쇄적인 상류층의 습성으로 어지간해서는 속
살 개방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
지만 이렇게 괜찮은 한옥을 주인 일가만 누릴 것이 아니라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한옥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로 개방하는 것은 어떨까? 북촌(北村)과 전주한옥마을, 안동
의 오래된 한옥, 경주 양동민속마을 한옥들이 내/외국인을 상대로 한옥 체험 및 숙박 제공으로
단단히 재미를 보고 있다.
이곳 집 크기도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크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청정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도 진하게 풍
겨 도심 속의 이색적인 분위기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방도 많고 사랑채 위에 테라스까지 갖
춘 매력도 있으니 어지간한 한옥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수도 있다. 교통도 도심에서 무척이
나 가깝고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그만하면 적당하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던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위쪽(서쪽) 돌담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별장 뒤쪽에는 이곳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숨바꼭
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에 살며시 들어와 고운 작품을 연출한 것이다. 화사하게 타
오른 단풍과 알록달록 물든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슬슬 올해를 정리한다. 겨울
제국(帝國)이 도래하면 모든 것을 다 공출당해 숨죽이고 있다가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 되면 다
시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은 이 바위를 타고 아래로 흘러
가 아담한 폭포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
체를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모습으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
을 쌓고 계단을 만들었는데, 붉은 색채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 바위와 폭포, 그리고 인왕산 계곡물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 세상 멋지게 살다가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남쪽에서 꽁꽁 가리고 있다. 사
랑채 기와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
랑채 바로 옆에는 서양식으로 만든 2층 붉은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큰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며, 옥상 테라스와 벽돌집은 이곳
만의 강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하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에 마련된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고 계단을 타고 올라
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테라스이다.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두 눈에 들어오는 범위
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다. 비록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지만 주변의 풍경
이 고와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다.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 속
세에서 마비된 머리와 정신이 싹 가시는 듯 하며, 머리도 맑아져 공부도 잘될 것 같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
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
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부암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른 명소들은 별도의 글에서 흔
쾌히 다루도록 하겠다.

* 반계 윤웅렬 별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내부 관람은 거의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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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11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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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6/11/25 10:29 | 서울 부암동 스폐셜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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