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짜리 지폐에도 나왔던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

 


'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
도산서원 현액
▲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액 - 한호(韓濩, 한석봉)의 글씨이다.
* 네이버블로그글 보러가기 http://blog.naver.com/py1978/220602945758


 

여름 제국(帝國)이 봄을 몰아내고 한참 성하(盛夏)의 기반을 닦던 6월 한복판에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다.

아침 일찍 부산에서 동대구행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팔공산 은해사(銀海寺)로 넘어갈
요량이었으나 변덕이 발동하면서 안동(安東)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경북 한복판에 자
리한 안동으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안동 제일의 고찰, 봉정사(鳳停寺)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도산서원 가는 67번
시내버스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길래 다시 변덕을 발휘하여 그곳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안동 외곽으로 가는 안동시내버스 대부분은 안동역(교보생명)에서 출발하는데 도산서원으
로 가는 버스는 지독한 유명세와 달리 겨우 1일 5회 다닐 뿐이다. 때마침 그 시간과도 맞
아 떨어지니 아무래도 오늘은 그곳과 인연이 있는 듯 하다.

어쨌든 67번 버스를 타고 거의 50분을 달려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서원 입구에는 여느 관
광지와 마찬가지로 조촐하게 가게와 식당이 터를 닦고 있는데, 평일이라 무척이나 한가하
다. 여기서 서원까지는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산책로를 6분 정도 걸으면 되며, 매표소에서
소정의 입장권을 구입해야 된다. 즉 유료의 땅이다.


▲  녹음에 젖은 도산서원 산책로


 

♠  도산서원 가는 길

▲  낙동강을 가르는 키 작은 다리
다리의 길이는 길지만 그 높이는 수면에 닿을 정도로 작다. 안동호의 수량이
넘치거나 폭우가 내리면 꼼짝없이 통제의 비운을 맞으며 다리 주변은
물속에 잠긴다. 저 다리를 건너면 시사단이 있는 의촌리이다.


도산서원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중간에 낙동강(落東江)을 옆구리에 낀다. 허나 강물은 저 밑에
흐르고 소나무가 운치를 머금은 산책로는 언덕 높이 둘러져 있으니 보기와 달리 그리 가깝지는
않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안동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안동댐의 영향이 크다. 댐이 들어서
면서 도산면과 예안면의 많은 땅이 희생되었고, 그 수몰지를 발판으로 안동호(安東湖)가 들어섰
으니, 서원 앞은 안동호의 상류가 된다. 다행히 도산서원은 높은 곳에 터를 잡아 강제 이주를
면했으나 서원으로 가는 길과 강 주변 풍경은 약간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서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조망이 일품인 천광운영대가 있다. 이곳은 3글자로 간단히 운영대(雲影
臺)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퇴계 이황이 '빛과 구름 그림자가 같이 돌고 돈다<天光雲影共徘徊
>'
는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퇴계는 그가 세운 도산서당
을 엄숙한 학습의 장으로 꾸미면서 하늘의 묘용(妙用)을 깊이 생각하고 자연의 심오한 뜻을 깨
우치는 장소로 삼았다.

이곳에 올라서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산에 둘러싸인 강 건너 지역(의촌리)이 훤히 두 눈에 바라
보이며, 바로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  천연대(天淵臺)

도산서원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 강변 낭떠러지에 천연대가 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
이 심성수양을 위해 산책을 즐기던 장소라고 한다. 천연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하늘
에는 새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어 논다<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에서 인용
했다고 하며, 천광운영대와 달리 소나무가 벼랑까지 뿌리를 내려 운치를 머금게 한다.


▲  강 건너로 보이는 시사단(試士壇)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3호

천연대와 운영대를 비롯하여 강과 접한 부분에서 낙동강 건너를 바라보면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유독 동그랗게 솟은 높다란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꼭대기에는 기와를 얹힌 비각(碑閣)
이 있는데, 그가 바로 시사단이다.

시사단은 1792년(정조 16년) 정조(正祖) 임금이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자 각신<閣臣, 규장각(奎
章閣) 관리> 이만수(李晩秀)를 보내 도산서원 앞에서 과거시험의 하나인 별시(別試)를 치르게
했는데, 이를 기념하고자 비석을 세운 것이다. 비문(碑文)은 당시 재상(宰相)으로 있던 채제공
(蔡濟恭)이 썼다.

원래는 강가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안전을 장담못하게 되면서 1976년 높이 10m, 반경 10m의
동그란 언덕을 쌓고 그 위로 옮겼다. 지금은 안동호의 수량이 적어 들판의 인공 언덕으로 있지
만 만수(滿水) 때는 주변이 물로 채워져 하나의 조금만 섬을 이루며, 서원에서 강에 놓인 키 작
은 다리를 건너면 시사단으로 접근할 수 있다.


▲  녹음에 잠긴 늙은 느티나무
서원 유생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쉼터를 제공하던 정자나무로 지금은
관람/답사객들에게 그늘과 쉼터를 베푼다.

▲  열정(洌井)

느티나무 옆에는 우물정(井)자를 고스란히 닮은 '井' 모양의 우물이 있다. 우물의 이름은 열정
으로 이는 역경(易經)에 나오는 '정괘(井卦)','정렬한천식(井洌寒泉食)'의 우물의 뜻을 취하여
붙인 것이다. 도산서당 시절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물이 맑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이 우물은 식수의 역할 외에도 다음의 숭고한 뜻도 담고 있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따라가
지 못하고, 물을 길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즐겨 길어 마시는 것과 같이 사람들
은 주인 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듯 자신의 노력으로 인격과 지식을 쌓
아 누구나 즐겨 마실 수 있는 샘물처럼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


현재 우물 안에는 물이 담겨져 있어 살아있긴 하다. 허나 우물의 보존 때문인지 아니면 죽은 우
물에 그냥 물만 형식적으로 넣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물을 속세로 끌어올릴 도구가 없어 거의 그
림의 떡 같은 우물이 되어버렸다. 현재 우물의 역할은 옆에 있는 현대식 수도시설이 대신 한다.


▲  조그만 한옥마을 같은 도산서원

*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聖地), 도산서원(陶山書院) - 사적 170호
우리나라 서원의 대명사이자 옛 1,000원권의 배경(현 1,000원권에는 계상서당이 나옴)인 도산서
원은 동방의 주자(朱子)로 추앙을 받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세운 도산서당(陶山
書堂)에서 비롯되었다.

퇴계는 1549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2칸짜리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독서
에 열중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허나 제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서당 건물은 이를
받쳐주지 못해 같이 지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더 넓은 새로운 서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제자들
과 주변을 물색하다가 현재 서원 자리를 발견하고 환호를 질렀다.
이곳은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인데다가, 밑에 강물이 흐르는 산수가 잘 어울리는 곳이었던 것이
다. 게다가 좌우 산자락도 적당히 감싸 안은 듯한 지형이라 산속에 궁색하게 박힌 계상서당과는
다르게 아늑하면서도 앞이 탁 트였다. 다만 장차 안동호가 들어설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너무
아래가 아닌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으니 이때가 1557년이다.

이렇게 터가 정해지자 서당을 짓기 위해 평소 인연이 있던 용수사(龍壽寺) 승려 법연(法蓮)에게
건축을 의뢰했다. 마침 퇴계는 공조판서(工曹判書)의 벼슬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는데, 설계도인
'옥사도자(屋舍圖子)'를 직접 그려 법연에게 보내 공사를 맡겼다.
허나 공사 과정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공사 중간에 법연이 입적(入寂)하면서 서둘러 같은 절
승려인 정일(淨一)에게 책임을 맡겼으며, 재정적인 어려움과 설계 변경으로 터를 잡은지 3년 만
인 1560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서당 건축을 승려에게 맡긴 것은 살림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고 한다.
서당이 완성되자 퇴계는 벼슬을 그만두고 그곳으로 내려와 도산서당이라 이름 짓고 제자들을 열
심히 길렀다.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1572년 서당 뒤쪽에 상덕사(尙德祠)를 지어 그의 위패를 봉안했고
, 1574년 유림(儒林)들의 호응과 지원을 받아 서당 위쪽에 서원을 지었다. 그래서 서당과 서원
은 같은 곳에 있게 된 것이며,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도산서원이라 부름) 1575년 조정으로
부터 도산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전교당에 걸린 사액 현판은 조정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쓴 것이다.
서원은 1576년 최종 완공되어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영남지역 유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
였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화를 면했으며, 1615년 퇴계의 제자인 월천 조목(月川 趙穆)을 배향했고,
1792년 정조 임금이 규장각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를 내리면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열었다.
그 기념으로 1796년 강 건너편에 시사단을 지었다. 그리고 1819년 장서를 보관하는 동광명실을
지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야심작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로 그 건재를 과
시했으며, 1930년에는 서광명실(西光明室)을 중건했고,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복원/정리
사업이 진행되어 1970년 유물전시관인 옥진각을 세웠다. 2003년에는 장판각(藏板閣)에 담겨있던
목판 2,790장을 인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넘겼다.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로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몰라도 도산서원은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3살짜리 어린애도 다 안다는 퇴계 이황과 인연이 깊은 곳이고 한때 1,000원권의 배
경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선비와 양반문화의 고장 안동에서 하회마을, 봉정사와 더불어 꼭 들
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안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낙동강이 서원 바로 아래까지 들어오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제대로 승경(勝景)을 이룬다.

서원의 구조는 농운정사와 역락재 등 학생들의 기숙사와 도산서당이 앞에 포진해 있고, 중간에
는 교육 공간인 전교당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있다. 제일 뒤쪽에는 퇴계의 위패를 모신 상덕
사가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띈다. 또한 가장 밑에 있는 역락재에서 전교당, 상덕사
로 올라갈 수록 그 중요성만큼이나 지형이 높아진다.

서원의 건물 중 전교당, 상덕사와 삼문은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 도산서원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① 안동까지 철도 이용
* 서울 청량리역에서 안동행 열차(원주, 제천, 영주 경유)가 1일 7회 떠난다.
* 부산 부전역(태화강, 경주 경유)과 동대구역에서 안동행 열차가 1일 3회 떠난다.
* 안동역 서쪽 교보생명(옛 시외터미널앞)에서 도산서원을 경유하는 안동시내버스 67번이 1일 5
  회 운행한다. (안동 출발 9:40, 10:50, 13:10, 13:50, 16:10)
* 67번 시내버스는 노선이 복잡하다. 반드시 서원 경유를 확인바라며, 차를 놓치거나 시간이 맞
  지 않으면 온혜리 방면 67번 버스(1일 17회, 반드시 행선지 요망)를 타고 도산서원3거리에서
  도보 25분
② 안동까지 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인천, 원주, 대전(복합), 청주, 제천에서 안동행 직행버스 이용
* 동대구에서 안동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 대구북부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10~30분 간격
  으로 떠난다.
* 부산, 울산, 구미, 창원(마산), 포항에서 안동행 직행버스 이용
* 안동터미널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시내버스(0, 0-1, 1, 11, 46, 80번 등)를 타고 안동역(교보
  생명, 옛 안동터미널)에서 도산서원 경유 67번 시내버스로 환승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중앙고속도로 → 서안동나들목 → 안동시내 → 청량산 방면 35번 국도 → 도산서원3거리에서
  우회전 → 도산서원 주차장

※ 도산서원 관람정보 (2016년 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500원 (30인 이상 단체 1,300원) / 청소년,군인 700원 (단체 600원) / 어린
  이 6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소형차 2,000원 / 대형차 4,000원
*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에는 17시까지)
*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 054-840-6576, 6599)
* 도산서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도산서원 전교당


 

♠  도산서원 둘러보기 (1) 역락서재, 도산서당

▲  역락서재(亦樂書齋) 외부

서원 앞쪽에 배치된 역락서재(역락재)는 도산서당과 비슷한 시기인 15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서원 제일 아래쪽에 위치하며, 담장에 둘러져 거의 독립된 공간으로 자리한다.
역락서재는 서당 학생들의 기숙사로 퇴계의 제자인 정사성(鄭士誠)이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서 기증했다. 온돌방의 서쪽 반 칸을 비워 아궁이를 설치했으며,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한때 학생들로 시끌거렸을 역락재,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문화유산의 귀한 몸이 되면서 어
느 누구도 방에 들어가 옛날처럼 숙식을 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는 먼지만 흐르는 세
월만큼이나 쌓여간다.


▲  농운정사(隴雲精舍)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퇴계가 직접 설계를
했고 용수사 승려인 법련이 세운 것으로 독특하게도 '工'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제자들
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장하는 뜻에서 그리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으나 저들 가운데 퇴계의 뜻을 이어받아 진정 나라와 백성
에 헌신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다. 대부분 썩어빠진 성리학(性理學)에 빠져 뜬구름 같은
사상이나 논하고 앉았고, 권력과 부에 몰두한 나머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으며, 명나라에 지극
한 사대(事大)를 벌이고 부국강병을 내팽겨쳐 끝내 나라를 망쳐놓은 이들이 많은 수를 차지할
것이다. 또한 유생이 된 양반들은 먹고 살 걱정은 없으니 서원에 처박혀 평생 공부만 하며 헛된
사상이나 논하다 세상을 마친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농운정사의 농은 '隴(땅이름 롱)' 대신에 '膿(고름 농)'을 쓰기도 한다.

▲  농운정사 동편 시습재

▲  농운정사 서편 관란헌

농운정사의 동편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여 학습의 공간으로 삼았고, 서편 마루는 관란헌(
觀瀾軒)이라 하여 휴식의 공간으로 삼았다.


▲  서원의 핵심부로 안내하는 중앙 계단길

▲  도산서당(陶山書堂)

서원 동쪽에 자리한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의 모태가 되는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깊은
건물이다. 
1557년 용수사 승려 법련과 정일에게 짓게 하여 1560년에 완성되었으며, 퇴계가 직접 설계를 했
다고 전한다. 퇴계는 여기서 제자들과 같이 먹고 자며 그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제
자와 유생들의 발의로 서당 뒤쪽에 서원을 지어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고,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으면서 지금의 도산서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원이 서당과 붙어있어 따로 보기도 하지만 엄
연한 서원의 일원이다.

서당 건물은 '一' 형태로 3칸 크기이며, 부엌과 온돌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부엌 반
칸과 마루 1칸을 더 달고, 건물 면에 퇴를 놓아 내었다. 덧지붕을 달고 마루를 길게 했으며, 방
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했는데, 이는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지
니지 못해 바위에 깃들어 조그만 효험을 바란다'
는 뜻, 즉 쉽게 말하면 공부에 자신이 별로 없
으니 바위에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툇마루가 넓어서 마루에 앉거나 신발을 벗고 마루에 들어가 쉴 수 있으며, 단 방에는 들어가면
안된다. 건물이 소박하여 서원 시절의 지어진 건물보다 은근히 정감이 쏟아진다.


▲  몽천(蒙泉)

서당 앞에 있는 몽천은 네모난 우물로 서당 및 서원 사람들의 식수원이다. 우물 이름은 몽천에
는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이는 역경(易經)의 몽괘(蒙卦)
에서 의미를 따서 붙였다. 서원 밖에 열천과 마찬가지로 물은 고여 있지만 먹을 수는 없다.

도산서원은 건물부터 우물, 나무, 강변에 이르기까지 제자의 올바른 길을 바라며 걱정하는 스승
퇴계의 지극하고도 따스한 마음이 듬뿍 함유되어 있어 답사객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제자를 무척 잘 챙겨주었고 손수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자고로 이런 스승이 많아야 세
상이 밝아지는 법인데 오늘날에도 그런 스승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도산서당의 마루인 암서헌
오랜 세월의 때가 곱게 깔려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내온 금송(錦松)
 이 나무는 박정희가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은
 것으로 1970년 12월 이곳을 방문했을 때 손수
 옮겨 심었다.


▲  낙동강 바람만이 잠시 스치고 지나는 도산서당 뜨락

▲  도산서당 앞에 자리한 연못 - 정우당(淨友塘)

도산서당 앞에 네모난 연못 정우당은 연꽃의 보금자리이다. 퇴계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
송하며 그들의 터전을 만들었는데, 진흙탕에 뿌리를 내려 물을 깨끗히 보듬고, 속은 비고, 줄기
는 곧아 남을 의식하지 않는 청정한 연꽃처럼 되기를 제자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  연잎 그늘에 의지해 햇살을 피하고 있는 아름다운 수련(睡蓮)

▲  매화나무 <매화원(梅花園)>
퇴계는 서당 옆에 매화나무를 심어 매화원으로 꾸몄다.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하는 4군자의 하나이다.

▲  절우사(節友社)
도산서당 동쪽에는 냇물이 흐르는데 그 건너편에 '절우사'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퇴계가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심어 가꾸던 서당의
조촐한 정원으로 지금 있는 나무들은 근래에 식재된 것이다.


 

♠  도산서원 둘러보기 (2) 전교당 주변

▲  전교당의 정문인 진도문(進道門)

도산서당에서 서원 중앙에 나 있는 계단길을 오르면 활짝 열린 진도문이 나온다. 서당과 서원을
잇는 공간으로 양 영역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하며, 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핵심인 전교당이 모습
을 비춘다.


▲  전교당에서 굽어본 진도문의 뒷모습

▲  진도문에서 내려다본 서원 중앙 계단

▲  진도문 우측의 서광명실(西光明室)

서광명실은 동광명실의 역할을 분담하고자 1930년에 지은 누각식 건물이다. 이곳에는 유학자의
여러 문집과 근래에 낸 책을 비롯하여 왜국(倭國) 유학자 손시교쿠수이(村士玉水)가 쓴 퇴계서
초(退溪書抄)가 있어 퇴계의 학문이 왜열도 유학에 큰 영향을 던졌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보
관된 서적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다.


▲  진도문 좌측의 동광명실(東光明室)

동광명실은 원래 광명실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진도문 우측에 또다른 광명실을 만들면서 이를
구분하고자 편의상 동/서광명실이라 부른다.
이 건물은 서원에 소장된 서적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공간으로 지금의 도서관으로 보면 된다. 서
광명실과 마찬가지로 누각식 건물이며,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건물을 누각식으로 지은 것은
습한 기운으로부터 서적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이는 고구려(高句麗)가 만든 국제적인 건축 양식
'부경'과 비슷하다.

지금의 동광명실은 1819년에 지어진 것으로 조선 역대 제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퇴계가 보
던 수택본(手澤本)을 보관했다. 이곳의 서적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가 있다.


▲  동광명실에 걸린 북
근래에 새로 달아놓은 북으로 수업시간과 여러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  동재(東齋) = 박약재(博約齋)
도산서원 학생의 기숙사로 박약은 학문을 넓게 배워 예로 행하라는 뜻이다.
건너편으로 서재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재 역시 기숙사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동재에 머무는 학생이 서재 학생보다 더 선배라는 점.

▲  서재(西齋) = 홍의재(弘毅齋)
도산서원 학생의 기숙사로 홍의(弘毅)란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되니, 그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 길은 멀다는 뜻이다.

▲  알맹이가 빈 장판각(藏板閣)

전교당 좌측에 자리한 장판각은 서원에서 낸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벽체 사방을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은 우물천정을 깔아 습기의 침입에 대비했다. 바닥도 지면에서 띄우고 전
면 위쪽에는 살창을 내어 통풍을 배려했다.
이곳에는 퇴계의 문집(文集)과 유묵(遺墨), 선조어필(宣祖御筆), 병서(屛書) 등 2,790장의 판각
이 있었으나 보존을 위해 광명실 서책과 함께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넘겼다. 현재는 판각이 있던
텅 빈 서장(書欌)만이 남아 옛날을 그리워 한다.


▲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 - 보물 210호

도산서원은 서당을 포함하여 몽땅 사적 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
당과 상덕사는 별도로 분리하여 보물의 지위를 안겨주었다.
전교당은 서원의 교육 공간으로 원장실과 강당(講堂)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도문을 들어서면
나그네의 기가 바로 오므라들게끔 건물을 받치는 기단(基壇)을 높여 위엄의 정도를 높였다. 성
리학 숭배자들은 짝수 칸을 싫어한다고 하던데 이를 무시하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으
로 지었다.
건물 정면 3칸은 문짝을 달지 않은 개방된 마루로 뒷면과 측면은 각 칸 마다 2짝의 여닫이 창호
를 달았으며, 문이 굳게 닫힌 서쪽 1칸은 원장의 거실로 한존재(閑存齋)라 불린다.

이 건물은 1574년에 지어졌으며, 1969년 보수했다. 전교당 정면의 도산서원 현판은 1575년 조선
조정이 도산서원을 서원으로 인정하면서 내린 것으로 글씨로 유명한 한석봉(韓石峯)의 글씨이며,
정조 임금의 사제문(賜祭文)을 비롯한 다양한 현판이 내부를 수식한다. 개방된 마루는 앉아서
쉴 수 있으나,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가는 건 삼가해주기 바란다.

▲  한존재 현판

▲  전교당 현판


 

♠  도산서원 둘러보기 (3) 나머지 부분

▲  상덕사 삼문(尙德祠 三門) - 보물 211호

전교당 뒤쪽에는 퇴계와 월천 조목의 위패가 봉안된 상덕사가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고
뒤쪽에 위치한 이곳은 서원의 사당으로 사당은 보통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나 이곳만큼은 팔작
지붕으로 차별화를 두었다. 앞면 반칸은 퇴칸으로 개방하고 퇴칸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나
머지 1칸 반은 앞면에만 문을 달았다. 앞면을 제외한 3면은 벽으로 두르고 내부는 하나의 통간(
通間)으로 만들었다.
상덕사는 사당이다 보니 제사일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 굳게 입을 봉하며 좀처럼 열릴 줄을 모
르는 고색이 자욱한 태극마크의 삼문 앞에 곱게 발을 돌릴 수 밖에는 없다.

삼문은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내삼문(內三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상덕사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계단 때문에 문 안쪽과 높낮이의 차이가 생기자 앞면 기둥을 1단 낮은 자리에 세
웠다. 그래서 기단 아래까지 기둥이 내려오는 특이한 형태를 띄는 것이다.


▲  전사청(典祀廳)

상덕사 서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전사청은 상덕사 제사 때 쓰일 제수(祭需) 음식을 만들고 보관
하는 공간으로 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건물(상덕사와 가까운)을 주청(酒廳)으로 하
고 서쪽 건물은 제사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로 삼았다. 사진에 보이는 방(문이 열려있
는 공간)은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儒士)가 목욕재계하고 하룻밤 지내는 곳이며, 마루에서 제상
을 보관했다.


▲  고직사(庫直舍)

전교당 서쪽에 자리한 고직사는 서원 관리인의 숙사로 서원 관리 및 학생들 식사와 상덕사 제사
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관리인은 주로 일반 백성이나 노비가 맡았는데, 여염집과 비슷한 모습으
로 남북으로 긴 'ㅁ'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방 7칸과 창고, 부엌 등 21칸 규모이다.
서원 경내에는 고직사가 2개 있는데, 전교당 서쪽의 고직사를 상고직사(上庫直舍), 농운정사 뒤
쪽 고직사를 하고직사(下庫直舍)라 구분하기도 한다.

부엌은 별도의 공간을 두지 않고 전사청과 연결되는 동쪽 통로와 하고직사로 통하는 남쪽 통로
옆에 각각 배치시킨 점이 주목을 끈다.

▲  고직사의 빛바랜 부엌들

먼지로 덮힌 솥뚜껑을 열면 모락모락 연기를 풍기는 기름진 쌀밥이 나올까? 하지만 현실은 밥은
커녕 먼지 밖에 없다. 아궁이도 불에 태울 땔감이 없어 멀뚱멀뚱 입만 열고 있다. 저녁 연기를
풍기던 왕년을 그리는 그들의 모습 앞에 막연히 초고속으로 변하는 사회에 매정함이 보인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솥뚜껑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인다.

▲  고직사의 창고들
쌀과 여러 물품을 보관하던 공간으로 습기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바닥을 땅에서
약간 띄워 놓았다. 현역에서 물러나 굳게 입을 봉한 창고에는
헤아리기 힘든 고색의 때가 잔뜩 묻혀있다.

▲  옥진각에서 상고직사로 올라가는 계단

▲  퇴계의 유품과 서원의 보물이 담긴 옥진각(玉振閣)

역락서재 옆에 자리한 옥진각은 퇴계의 유품과 서원의 보물이 담긴 유물전시관으로 1970년에 지
어졌다. 외부는 한옥으로 내부는 현대식으로 되어 있는데, 건물의 이름인 옥진은 '집대성 금성
옥진(集大成 金聲玉振)의 줄임말이다.
이곳에는 퇴계가 생전에 쓰던 베자리와 베게, 안석(案席)을 비롯하여 백자타호(白磁唾壺), 투호
(投壺), 매화가 새겨진 매화벼루, 옥으로 된 서진(書鎭), 벼루집, 서궤(書櫃), 노년 시절에 짚
고 다닌 청려장(靑藜杖)이란 지팡이, 꽃무늬를 조각한 매화 등이 있으며, 퇴계가 설계하고 제자
이덕홍(李德弘)이 만든 혼천의(渾天儀)가 있어 퇴계가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음을 알려준
다. 옥진각 내부는 아쉽게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그곳 유물 관련 사진이 일절 없다. 몰래라도
담으려고 했는데 눈치가 너무 심해서...


▲  도산서원을 뒤로 하며

서원은 유학과 관련된 존재라 절에 비해 재미와 볼거리, 화려함이 많이 떨어진다. 듣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는 유학의 중심지로 오늘날의 사립 상급학교라고 보면 될 듯 싶다.
향교를 나온 유생들은 학문과 출세를 위해 서원에 진학했고, 서원에서 학문을 갈고 닦아 성균관
(成均館)으로 진학하거나 과거에 응시했다. 또한 서원에 눌러앉아 공부를 하거나, 휼륭한 스승
을 찾아 이 서원, 저 서원 돌아다니는 철새도 적지 않았다. 허나 서원은 엄연한 양반의 공간이
다. 유학을 기본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조정에서는 유학의 보급과 백성들 교화를 위해 서원에
서적과 노비, 토지, 자금을 두둑히 지원해 주었고, 서원 공사에 백성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하
지만 서원에 죽치고 앉는 유생의 수가 늘고 그 머릿수가 느는 만큼 경비는 늘어난다. 그만큼 국
가의 지원도 늘어나야 되는데, 이 모두 백성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서원 유생들은 군역의 의무도 없고, 납세의 의무도 없으니 그저 공부한다는 구실로 서원에 죽치
고 앉으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유학 이론에 목숨 걸며 이론 논쟁이나 하고 앉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백성을 위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공간이 아닌 백성을 등처먹고 그들 위에 군림
하며, 쓸데없는 이념 논쟁이나 일삼는 밥버러지 공간이 되었다. 심지어 화양서원(華陽書院) 등
은 큰 조직을 이루며, 관아에 지원을 요구하고 대놓고 백성들을 갈취했다.
그렇게 민폐를 끼치며 독버섯처럼 성장한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정리사업에 보기 좋게 철퇴
를 맞고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47개만 간신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나는 서원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재미도 없고, 철저히 유학과 관련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관심
이 적은만큼이나 아는 것도 적다. 그래서 서원에는 잘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꿩 대신 닭으로 찾아갔던 도산서원에서 버스 시간 관계로 거의 2시간을 머물러 있었다. 도산서
당 툇마루에 앉아 쉬기도 했고, 전사청 마루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으며, 천연대 벤치
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도산서원 초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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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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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6/01/23 16:29 | 경북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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