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조계사 연등 나들이

 


' 서울 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나들이 '

조계사 8각10층석탑
▲  조계사 8각10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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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연등회 연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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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여름의 경계인 5월은 계절의 여왕으로 일컬어진다. 꽃샘추위란 이름으로 4월까지 천하를
어지럽히던 겨울 제국의 잔여 세력이 봄에게 완전히 소탕되면서 세상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다. 이때가 되면 전국에서 많은 축제가 산발적으로 열려 나들이객을 참 바쁘게도 만드는데 그
중에는 서울연등회도 있다.

서울연등회(서울연등축제)는 봄 축제의 백미(白眉)이자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
일의 축제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주말에 열리는데 토요일에는 축제
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이 장충동 동국대에서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종로1가)
까지 장엄하게 펼쳐지며, 일요일에는 우정국로를 중심으로 전통문화마당과 연등놀이가 열린다.
그래서 후배 여인네와 일요일 전통문화마당을 구경하러 나갔다. 이런 좋은 축제는 꼭 봐야 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일요일 전통문화마당 일부와 조계사 주변에 전시된 연등,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조계사를 다루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북쪽 시작점(안국동로터리)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은 조계사와 우정국로(종각역~안국동로터리) 일대에서 열린다. 우정
국로는 4발 수레들로 늘 번잡한 곳이지만 연등축제만큼은 도로를 통제하여 콧대 높은 수레들의
바퀴를 막는다. 그래서 도심 속 대로를 4발 수레의 눈치 없이 두 다리로 마음껏 거닐 수 있는 1
년에 몇 안되는 날이다.
서울연등축제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 1주 전 주말에 열린다. 주말 전날인 금요일에 조계사
와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통교 구간)에서 전통등 전시회가 그 서막으로 열리
며, 보통 초파일 다음날까지 불을 밝힌다.

축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동국대(東國大) 대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열
린다. 이 마당은 연등행렬의 사전 행사로 관불의식과 법회,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열리며, 18시
부터 연등회의 갑(甲)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동국대 대운동
장을 출발하여 동대입구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4거리 직전까지 이
어지는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커다란 연등(장엄등) 상당수가 등장하면서 연등행렬의 분위
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행렬 진행시간은 3시간 정도로 조계사를 비롯해 서울의 상당수 사찰과 경기도와 지방의 일부 사
찰, 불교 종파와 단체/학교에서 보낸 사람들과 온갖 연등(燃燈)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
보이는 등은 5~10만 개에 이른다고 하니 (2015년은 5만 개) 가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고 있어 전혀 식상하지 않다. 게다가
행진 중에 사물놀이와 가벼운 춤 공연, 율동 등이 끊임없이 펼쳐져 지루할 틈이 없다.

햇님이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빼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어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 시간에는 동대입구역에서 동대문, 동대문에
서 광화문4거리까지 도로를 통제한다.

연등행렬이 광화문4거리와 종로1가 사이에 다 모이면 보통 21시부터 회향(廻向)한마당이 펼쳐진
다. 종각역~광화문4거리 구간과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큰 법회와 전통 공연이 펼쳐지며, 거리를
행진한 장엄등(연등)은 이들 구간에서 모두 걸음을 멈추어 사람들의 사진 모델이 되느라 분주하
다. 특히 몇몇 장엄등은 몸을 움직이거나 불, 연기를 쏘는 것도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렇게 회향한마당은 23시경에 막을 내리고, 장엄등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 둔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우
정국로 전체가 온통 축제의 장이 되는데, 불교와 관련된 온갖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
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민속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한쪽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떡이나 파전, 비빔밥, 식혜 등을 사먹으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 체험, 사찰/전통 음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도 많이 만
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전통문화마당은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며 19시쯤 되면 연등놀이의
몸풀기 행사인 연등행렬을 벌인다. 조계사 등 몇몇 절과 불교 단체에서 보낸 사람들이 개량 한
복이나 공연에서 입는 고운 빛깔의 옷을 차려 입고 형형색색의 연등을 들며 커다란 장엄등을 이
끌고 거리를 행진하는데,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과 종로2가, 종각역을 거쳐 조계사 인근 연등
놀이 행사장까지 돈다. 행진 중간에 사물놀이와 조촐한 춤 공연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천천히 이
동한다. (1시간 정도 걸림)
연등놀이 행사장에 이르면 연등회의 마지막 행사인 연등놀이 공연이 펼쳐진다. 앞서 연등행렬에
참여한 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공연부터 현대식 공연까지 다채로운 공
연이 흥겹게 펼쳐지며, 공연 마지막에는 보통 강강술래를 하는데, 공연자와 관람객이 한데 어우
러져 신명나게 몸을 흔든다. 이때 허공에서는 꽃비(분홍색 전통 종이)를 뿌려 흥겨운 분위기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이 공연은 21시대에 끝나며, 이것을 끝으로 이틀 동안 펼쳐진 연등회는 아쉽지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때는 마음이 뻥뚫린 듯 얼마나 허전하던지, 지나간 시간이 원망스럽다.

이렇게 서울연등회는 단순히 불교 축제가 아닌 좁게는 서울, 넓게는 천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울리는 대축제로 천하 제일의 축제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다.


▲  우정국로 북부에 자리한 연등/연꽃장식 만들기 체험공간
이곳은 주로 외국 관광객들 위주로 진행된다. (물론 유료임, 돈좀 쓰고 가라는 뜻)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그렇다면 이 연등회는 언제부터 열리
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에서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세를 탄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중/후기에 이미 연등을 밝혔음을 보여준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열어 만백성이 즐겼고, 등을 며칠 동안 밝히면서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석가탄신일이 연관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석가탄신
일에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
를 연 것이 그 최초 기록이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
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조정의 불교 탄압으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
속 연등회를 즐겼다. 저녁에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
등은 한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은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각가지 연등을 만들어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시작이 되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96년부터 동대문운동
장(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후 동국대에서 출발하여 지금에
이른다.


▲  도심 속 대로(大路)에서 펼쳐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배가 볼록 나온 아기부처가 빨간 일산(日傘) 밑에서 중생들의 시원한 하례를 받는다.

▲  멀리 해동(海東)까지 놀러온 태국 불상

5월(어쩔 때는 4월 말)만 되면 나도 모르게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연등회, 그 연등회의 전통문
화마당에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 문화도 만날 수 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몽골, 네팔, 부탄, 베트남,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이 서울연등회의 명성에 앞다투어 찾아와
공간을 하나씩 받아 그들의 불교 문화를 열심히 홍보한다. 이국적인 불상과 불교 용품은 물론
문화 체험과 다과 시식까지 가능하다.


▲  금박을 붙여서 만든 태국 불상의 위엄 ~~!
보시함에 돈이 참 수북하다. 저건 돌아갈 비행기 여비인가..?

▲  진지한 분위기의 도자기 만들기 체험장

▲  북청(北靑)사자놀음 - 중요무형문화재 15호

우정국로 공연장에는 온갖 전통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단연 인기가 높은 것은 북청
사자놀음(북청사자놀이)이 아닐까 싶다. (그외에 남사당놀이도 있음) 서울연등축제에 매년 등장
하는 단골로 우리 땅임에도 전혀 들어갈 방법이 없는 함경남도 북청의 오랜 민속 놀이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놀이와 가면놀이의 일종으로 대륙계와 북방계의 사자춤이 민속화된 대표적
인 예이다. 함경남도에는 많은 사자놀이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이 북
청이다.
북청의 주요 사자놀이패로 북청읍의 사자계(獅子契), 가회면의 학계(學契), 구 양천면의 영락계
(英樂契), 청해면 토성리의 사자놀이가 유명했으며, 특히 북청읍 사자는 댓벌 사자라 하여 이촌
/중촌/넘은개/동문밖/후평/북리/당포 사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마을마다 사자의 모습을 달리
해서 놀았다. 그리고 북청 관내에 사자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며 경쟁하면서 사자놀이 패들이 많
이 통폐합되었다.

이 놀이는 음력 정월 14일에 여러 마을에서 장정들의 편싸움으로 그 막을 올리는데, 대보름달이
만연하게 뜬 뒤에 사자놀음이 펼쳐져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6일 이후에는 초청받은 집을
순회하며 노는데, 마당에 들어가 춤을 추면 사자가 마당을 거쳐 안방문을 열고 큰 입을 벌려 무
언가를 잡아먹는 시늉을 한다. 이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며, 그 다음에 부엌으로 들어가 같
은 행동을 취하고 마당으로 나와 춤을 춘다.
이때 집 주인의 요청이 있으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竈王)과 시렁 앞에 엎드려 그들에게 절을 한
다. 또한 아이를 사자 등에 태우면 오래 산다고 하며, 몰래 사자 털을 뽑아두면 장수한다고 하
여 사자 털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장수를 빌면서 오색포편(五色布片)을 사자 몸에 매어주
기도 했다.

서울에서 한참이나 먼 북청의 사자놀이가 서울로 온 것은 해방 이후이다. 북한의 핍박을 피하고
자 내려온 사자놀이 기능보유자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놀이를 퍼뜨렸는데, 객지라 그런지 고향처
럼 하기에는 좀 힘들고 해서 내용이 좀 달라졌다.
우선 퉁소와 북으로 반주를 하며 애원성춤을 추고, 마당돌이로 하인 꼭쇠(꺾쇠)가 양반을 데리
고 나와 그를 조금씩 야골리면서 마당을 진행한다. 양반이 심심하다고 하니 꼭쇠가 악사(樂士)
, 무동(舞童), 꼽새 등을 불러 한데 판을 벌인 다음 끝에 비로소 사자를 소환한다.

사자는 짐승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용맹하고 무서운 동물이 분명하지만 여기서 만큼은 웃음을 머
금게 하는 귀엽고 해학적인 사자탈과 털이 달린 가죽을 뒤집어 쓰며 어슬렁 나타난다. 보통 2명
이 1마리의 사자를 이루는데. 많을 경우에는 3인 1조가 되기도 한다. 사자는 상좌승(上座僧)과
계속 춤을 추며, 다양한 재주를 부리다가 잠시 쓰러진다. 이에 양반은 상좌승을 불러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외우게 하지만 사자는 꿈쩍도 안한다. 그래서 의원을 소환해 침을 놓으니 그때서
야 일어난다. 이때 꼭쇠가 토끼(예전에는 아이였다고 함)를 먹이니 사자는 먹는 시늉을 하며 굿
거리장단에 맞춰 극을 이끈다.
이에 양반은 기뻐서 사자 1마리를 더 소환하고 사자춤과 상좌승의 승무(僧舞)가 한데 어울린 다
음, 사자가 퇴장한 뒤에 마을 사람들이 '신고산타령' 등을 부르면서 군무를 추고 끝낸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춤의 묘기와 흥겨움, 그리고 악의 기운을 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기능을
수반한 민속놀이로 그 흔한 양반과 파계승(破戒僧) 풍자는 없다.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1)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2)

공연이 끝나면 사자춤을 춘 사람들은 사자탈과 보기만 해도 찜통같은 가죽을 벗고 본모습을 보
인다. 중장년층으로 생각했지만 그 속에서 나온 이들은 뜻밖에도 앳된 20대들. 수많은 옛 무형
자산들이 마땅한 계승자를 찾지 못해 고사 직전에 놓인 것들이 허다한데, 북청사자놀음은 저들
로 인해 무척 든든함을 느낀다. 내가 백발이 되는 먼 훗날까지 길이길이 이어갔으면 좋겠다.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남쪽 시작점(종각역4거리 북쪽)

▲  종각역4거리 북쪽에 마련된 외줄타기 현장
어린이들이 부모 손에 의지하며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에 임한다.

▲  어지간해서는 참 보기가 힘든 괘불(掛佛)도 칠흑같은 괘불함을 박차고
서울로 올라왔다. 괘불 앞에서는 한참 승무가 벌어지고 있다. ▼


♠  서울연등축제 연등의 물결

▲  종각역4거리에 놓인 연등 (2013년)

조계사 북쪽과 우정총국(郵征總局) 주변, 그리고 종각역4거리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은행
, 2015년에는 이곳에 연등을 두지 않았음) 주변에는 크고 작은 연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날 연등행렬에 쓰인 장엄등도 몇 개 있음)
이들은 초파일 당일이나 다음날까지 이곳에 있으며, 낮에는 햇님의 눈치로 조용히 색을 입힌 모
형물로 웅크리고 있지만 그가 없는 저녁에는 마음껏 몸을 밝히며 연등의 이름값을 한다.


▲  여의주를 문 푸른 빛깔의 목어 (또는 용)
뒤쪽에 두툼하게 솟은 푸른 빛깔은 꼬랑지가 아닌 바다 물결이다.
물결을 헤치며 자기 갈 길을 가는 목어의 위엄~~


▲  반토막난 생선 쪼가리 목어를 열심히 두드리는 승려

▲  수초 사이를 유유자적 거니는 물고기 (목어를 상징)

▲  연잎과 물고기(목어)를 든 남녀 동자들

▲  하얀 구슬을 품은 연분홍 연꽃

▲  잔뜩 부풀어 오른 하얀 연꽃(백련)

▲  귀엽고 상큼한 모습의 달마대사 연등

▲  요즘 똥개도 물고 댕긴다는 스마트폰 연등
스마트폰 화면을 연등축제에 걸맞게 목어로 채웠다.

▲  우정총국 북쪽에 조촐하게 연등터널을 세웠다.

▲  부엉이 연등

▲  반야용선(般若龍船)
관음보살 누님이 용머리 배의 선장이 되어 망자(亡者)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
나중에 이승을 뜨게 된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꼭 타보고 싶은 배이다.

▲  귀여운 동자승이 탑돌이를 하는 연등과 신들린 모습으로
법고를 치고 있는 승려 연등

▲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는 하얀 코끼리 연등

▲  비파를 연주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칼을 쥐어든 증장천왕(增長天王), 코끼리에 탄 보현동자 연등


♠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중심지이자 도심 속의 조촐한 휴식처
~ 서울 조계사(曹溪寺)

서울 도심의 완전 한복판인 금싸라기 땅, 종로1가 견지동(堅志洞)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
인 조계사가 자리해 있다. 견지동이란 이름은 뜻을 견고히 한다는 뜻으로 조선 때 견평방(堅平
坊, 견지동 주변)에 있던 의금부(義禁府)에서 민원이나 법을 집행할 때 굳은 뜻으로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조계사의 시초는 1910년에 창건된 각황사(覺皇寺)로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옛 중동학교터)에 있
었다. 조선시대에 서울 도심에는 정릉(貞陵)의 원찰인 흥천사(興天寺, 정동에 있었음), 탑골공
원에 있던 원각사(圓覺寺), 그리고 명륜동(明倫洞)에 흥덕사(興德寺)가 있었는데, 원각사와 흥
덕사는 연산군(燕山君) 때 파괴되었고, 흥천사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 사라지면서 서
울 도심의 사찰은 완전 씨가 마르게 된다. 하긴 억불숭유를 강조하던 조선 심장부에 버젓히 절
이 있다면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겠다.
이후 400년의 공백을 깨고 조계사의 시초인 각황사가 도심에 싹을 내렸다.

1911년 왜정(倭政)이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선포하여 조선의 모든 절을 이토 히로부미의 원
찰(願刹)인 박문사(博文寺, 현재 장충동 신라호텔)에 귀속시키려 하자 해인사(海印寺)주지 회광,
마곡사(麻谷寺) 주지 만공(滿空), 승려 용운(龍雲) 등이 급히 각황사에 모여 31본산 주지회의를
열었다. 이때 용운의 제의로 총본산제도를 추진하면서 조계사(각황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
사찰로 서서히 싹수를 트게 된다.

1929년 승려 104명이 모여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宗會法)을 제정했다. 당시
절의 규모가 암자보다 못한 수준이라 만해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곳을 명실상부한 조선 불
교의 총본산으로 키우려고 궁리했는데, 지암 종욱(智庵 鍾郁)이 총본산 건설 31본산 주지 대표
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중 1936년 전북 정읍을 기반으로 하던 보천교(普天敎)가 왜정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사
건이 터지면서 보천교의 중심 법당인 십일전(十一殿, 전북 정읍 소재)이 경매로 나왔다. 이 건
물은 1929년에 지어진 천하에서 가장 큰 목조 단층 건물로 지암은 그 건물에 반응을 보이며, 과
감히 매입을 단행했는데, 구입 비용은 무려 12,000원이 들었으며 (지금으로 환산하면 12억 이상
) 그 건물을 모두 분해하여 가져와 대웅전을 지었다.
공사를 맡은 이는 도편수(都片手) 최원식(崔元植)으로 1920년대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
殿) 재건 공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대웅전 건립을 위해 인근 경복궁(慶福宮)과 덕수궁 건
물을 조사했으며, 단청과 벽화를 맡은 이는 당시 그림으로 알아주던 금용 일섭(金蓉 日燮)이다.

1937년 민영환 집터와 우정총국 일대를 사들여 절을 옮겼고, 1938년 10월 25일 준공 봉불식(奉
佛式)을 거행해 서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 그 장엄함을 드러냈다. 또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있던 태고사(太古寺, 지금도 있음)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갈았다.
대웅전 건설과 절 이건 비용을 위해 31본산에서 100,402원 47전을 모아 보냈으며, 중앙불교전문
학교 교수였던 권상노(勸相老)가 상량문을 작성했는데, 왜정의 눈치가 심하여 조선총독의 '심전
개발(心田開發)'을 기념하고자 대웅전을 지었다는 내용을 적었다. 또한 많은 중생이 각자의 소
중한 물건을 발원문을 첨부해 대웅전에 넣었다.
이토록 천하가 주목할 정도로 요란하게 절을 옮겼지만 정작 경내를 메운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
가 전부였다. 대웅전 하나가 여러 건물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참고로 보천교는 증산교(甑山敎)에서 파생된 것으로 차경석(車京錫)이 교주(敎主)로 있었는데,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국호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십일전 완성을 계기로 신도들로부터 차천자
(車天子)로 추앙을 받았다. 허나 교내 분열과 친일 행적 등으로 말썽이 많았고, 1936년 차경석
이 죽자 왜정은 보천교를 강제로 폐지하고 건물을 경매로 내놓아 짭짤하게 수입을 챙겼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합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
불교 조계종이 발족했고, 제1대 종정(宗正)으로 한암이 취임했다. 1945년 9월에는 이곳에서 전
국승려대회가 열려 왜정 때 만들어진 사찰령과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하고 새롭게 조선불교 교헌
(敎憲)을 제정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무심한 총탄으로 요사가 반이나 날라갔고, 대웅전도 우측 처마에 포탄을 맞
아 상처가 생겼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을 계기로 인근 안국동 선학원(禪
學院)에서 불교 정화운동을 벌이던 승려들이 이곳에 들어와 조계종의 이름을 딴 조계사로 이름
을 갈았다.
허나 그로 인해 비구승과 대처승(帶妻僧)의 대립이 심해지자 대처승 세력은 조계사를 인정하지
않고 태고사를 고집했다. 그래서 절은 하나인데, 이름은 2개인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고, 비
구를 중심으로 간신히 조계종이 성립되면서 조계사로 이름이 통일되기에 이른다.

2003년에는 대웅전을 해체 보수했는데, 종도리를 받치는 통장혀 중앙부분 장방형 홈에서 1937년
대웅전 건립 때 넣은 상량문을 비롯해 217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시절 생활사와 상황
을 고스란히 전해주었으며, 200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다.

법등(法燈)을 켠지는 이제 100년을 조금 넘었고, 지금에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80년 남짓, 건
물도 대웅전이나 좀 나이가 있을 뿐 고색(古色)의 기운은 그리 익지도 않았다. 오래된 멋도 거
진 없고, 산사의 고즈넉함도 없고, 수수하게 생긴 절집도 아니다보니 그런 절을 선호하는 이들
에게는 썩 좋은 절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있다고 도심 속에 박힌 잇점과 속세에 늘 열려있는 공간으로 평일에
는 잠깐 들려 쉬었다가는 직장인과 도시인들이 많다. 아마도 이 땅의 절 가운데 직장인들이 가
장 많이 찾는 절이 아닐까 싶다. 휴일에는 신도와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
고 물갈이가 잘된다. 특히 서울연등회(연등축제)와 석가탄신일에는 발을 들일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며, 축제의 절정에 이른 조계사는 절과 사람의 향기, 그리고 흥겨움이 강하게 묻어난다.
그리고 매일 18시가 되면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을 깨워 회색빛 도심에 잔잔하
게 사물의 소리를 베푼다.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조계종의 본산으로 경내는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나 대웅전과 현대
식 건축물 등 으리으리한 건물이 많다보니 경내가 제법 넓게 다가온다. 게다가 서울 도심 한복
판이라 교통과 접근성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조계사는 지금 크기가 딱 좋은 거 같음)
대웅전과 극락전, 설법전, 종무소, 안심당, 범종루,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교대학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천하에 희귀종인 백송
이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대웅전과 석가불도, 목불좌상 등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
고 있다. 또한 대웅전 뜨락에는 500년 묵은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고, 경내 동북쪽에는 우정총국
이 자리해 있다.

번잡한 도심 속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런 도심과 달리 절은 평온하기 그지없으며, 종로1가를
지날 일이 있으면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절집의 하나이기도 하다.


▲  조계사 일주문(一柱門)

동쪽을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조계사의 실질적인 정문이다. 경내가 사방으로 뻥 뚫려있다 보니
진입로가 많아 굳이 일주문의 검문을 받을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절의 상징적인 대문이니 경
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나갈 때 거쳐가는 것도 좋다.

원래 조계사는 일주문이 없었다. 절의 필수 요소인 일주문이 없는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
지 2005년 3월 절을 중창하면서 일주문의 백미로 꼽히는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계문을 모방해
하나 장만했고, 2007년 10월에 현판과 주련을 달아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현판과 주련은 당시
한국서예가협회장이던 송천 정하건 선생이 쓴 것이고 서각은 철제 오옥진 선생이 했다.

명세기 이 땅의 중심 절집이다보니 문의 크기는 단양(丹陽) 구인사(求仁寺) 일주문의 다음 가는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도 장대하거니와 특히 폭이 넓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  또 다른 하늘을 이루고 있는 오색 연등의 위엄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장대한 오색 물결 앞에 두 눈이 제대로 놀라
고 만다. 입도 한없이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질 않았지~~ 낮도 이러한데, 햇님이 꽁무니를 빼
는 저녁이 되면 더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  연등 밑에 있는 커다란 연꽃무늬 연등

▲  조계사 사적비(事蹟碑)와 법등명(法燈明) 연등

조그만 다양한 연등이 걸린 법등명 수레 옆에 미끈한 피부의 비석이 보일 것이다. 그 비석은 조
계사의 역사를 담은 사적비로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智冠)이 2009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지관은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2012년 1월 정릉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입적을
했는데, 그는 조계사에 마땅한 사적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손수 자료를 모아 9천 자에 가
까운 내용을 담았다. 비석의 밑도리와 머리장식인 귀부와 이수는 여주 고달사(高達寺)의 원종국
사탑비(元宗大師塔碑)를 본따서 만들었다.


▲  연꽃을 들고 샤방하게 뛰어가는 동자승과 비파를 연주하는 동자 연등

▲  조계사 관불의식의 현장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 보인다. 허나 석가탄신일이
지나면 강제로 다시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가야 되니 그의 심정도 모르고
떨어지는 해가 무척 야속할 것이다.


▲  왼손을 내밀고 있는 천진불

백송 앞에는 2006년 3월에 만든 천진불이 그 이름 그대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요즘
이런 천진불을 갖춘 절이 제법 되는데, 표정과 모습이 귀여운 것은 좋지만 왼손을 내밀며 '야~
한푼 내놔~!!' 이러는 것 같아서 저 손짓만 고친다면 참 바람직한 천진불이 될 것 같다.

▲  조계사 백송 - 천연기념물 9호

대웅전 동쪽에는 이곳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인 백송이 하얀 피부를 드러내며 경내에 짧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백송은 말그대로 하얀 소나무로 나이를 먹으면서 껍질이 벗겨져 줄기가 회백색이나 하얀색으로
변하는 매우 희귀한 소나무이다. 그들의 고향은 중원대륙 북부이나 그곳에서는 진작에 씨가 말
라버린 상태이며,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기념으로 가져온 백송 일부
가 간신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던 통의동(通義洞)
백송을 비롯해 원효로(元曉路) 백송과 보은(報恩) 백송이 숨을 거두면서 그 개체수는 이제 한
손에 꼽을 정도이며, 다행히 그들의 후손이 사릉(思陵) 전통수목 양묘장과 재동(齋洞)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 북쪽, 그리고 창경궁에서 자라나고 있어 품종 전멸은 면했다.

조계사 백송은 5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누가 가져와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높이
는 약 14m, 뿌리부분 둘레 1.85m, 가슴 높이 둘레가 1.8m이며, 수송동(壽松洞)이란 지명도 바로
이 나무에서 비롯되었다. 즉 오래된 나무가 있는 동네란 뜻으로 원래는 지금의 수송공원에 있었
으나 그곳에 있던 각황사가 현 위치로 이전되면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져 외과수술을 크게 받을 적이 있는데, 그때 큰 줄기는 절단되
었다. 허나 절을 찾는 사람이 많고, 나무에게 주어진 땅이 좁기 때문에 나무의 기운도 예전 같
지가 않아 이 땅에 오래된 백송이 또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게다가 나무 주위를 연등
으로 화사하게 꾸며놓아 나름 눈요기감을 선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를 가두는 꼴이 되어 조금
은 답답해 보인다. 연등 수입도 좋지만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그에 대한 배려도 절실해 보인다.


▲  조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7호

조계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단층 불전(佛殿)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얼마나 허벌나게
크던지 건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죄다 개미보다 못하게 보인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면적은 무려 155.7평에 이른다. 1936년 왜정
에 의해 해체되어 경매로 나온 보천교 십일전을 거금 12,000원으로 매입하여 그 자재로 만들었
는데, 옛 십일전의 모습도 어느 정도 살렸다.
조계사가 이 큰 건물에 눈독을 들인 것은 조계사가 바로 조선 불교를 대표하는 존재였기 때문이
다. 나날이 힘이 더해지는 왜식 불교에 맞서고 민족 대표 사찰에 걸맞게 법당을 크게 지을 필요
가 대두되면서 때마침 나온 십일전이 그 역할을 하게 되었고, 1938년 완성을 보았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양식을 보이면서도 나름 독특한 양식을 간직한 20세기 초/중기 건물로 사방
에 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안그래도 큰 건물이 더욱 커보인다. 건물 외벽에는 온갖
꽃창살과 벽화가 장엄했으며, 대웅전 건립 기념으로 영암 도갑사(道甲寺)에서 가져온 목불좌상
을 본존불로 삼았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조계사 홈페이지에는 15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나옴, 반면 문화재청에는 조
선 전기 양식을 간직한 조선 후기 불상이라고 나옴)
에 조성된 것으로 대웅전 규모에 걸맞지 않
게 많이 왜소하다는 지적이 많자 2006년에 새롭게 거대한 석가3존불을 봉안했다. 목불좌상은 불
단 우측으로 옮겨졌으며, 추후 영산전을 만들면 그곳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한다. 이 목불좌상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6호
이다.
그리고 대웅전 현판은 조선 선조(宣祖)의 8번 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해서체로
남긴 화엄사 현판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그 뒤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연병장처럼 넓은 대웅전 내부에는 예불을 하는 중생들로 가득하다.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바친
온갖 제물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이고, 불상은 그것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시
주함에는 돈이 넘쳐나 함이 터질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3존불은 2006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 땅에서 단층 불전에 봉안된 불상 가운데 제
일 크다. 그들이 너무 큰데다가 금빛 찬란해 두 눈이 달아날 지경으로 그들 뒷쪽에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석가불도가 걸려있는데, 불상이 너무 커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석가불도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로 20세기 초반에
조성되었다. 왜정 때 유명했던 불교미술작가 김일섭(金日燮)이 그린 것으로 그 시절 불교의 모
든 종단이 뜻을 합쳐 만든 불화라는 점과 김일섭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가 인
정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대웅전 앞에도 관불의식 장소를 두었다.
철모르고 찾아온 이른 더위에 시원하게 냉수욕을 하는 그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를 다른데로 내보내고 내가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만약 그렇게 되면 관불은 커녕 바가지로 싸대기`맞겠지..?

▲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연등이 의기투합하여 하늘을 완전히 지웠다. 연등은 하늘을 메우는 구름이 되고
그들을 경계로 하늘과 땅으로 나눠진 것 같다. 연등 밑은 밝은 대낮임에도
연등의 위엄에 가려 어둡다.

▲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대웅전 뜨락

▲  조계사의 꿀재미, 연등 구름의 물결
측정불가의 깊은 하늘이 이날만큼은 대웅전 평방 높이로 팍 내려앉은 것 같다.

▲  하얀 연등이 수를 놓은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좌우에 둔 아미타3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극락전, 2층은 설법전(說法殿)으로 쓰인다.

극락전 앞에는 다른 공간과 달리 하얀 연등이 가득한데, 이들은 죽은 이들, 즉 어려운 말로 영
가(靈駕)를 위한 연등이다. 저녁이 되면 일제히 하얀 빛을 발산해 알록달록 연등 빛보다는 다소
엄숙하거나 오싹할 수 있다. 

극락전 남쪽에는 범종루, 안심당(安心堂) 등이 있으며, 안심당 지하층(거의 지상 1층임)에는 만
발(萬鉢)이라 불리는 공양간이 있다. 만발은 1만개의 발우라는 뜻으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  도시를 바탕에 둔 범종루와 극락전(오른쪽)

범종루에는 부처의 메세지를 담은 4개의 물건,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오전 4시와 저녁 6시
가 되면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의 순으로 치는데, 같은 사물 소리라고 해도 첩첩한 산주름 속
에 자리한 산사에서 듣는 것과 도시 한복판에서 듣는 것이 참 다른 것 같다. 공해가 가득한 곳
에서 들으니 그때만큼은 잠시나마 외딴 산사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연등 구름에 윗도리가 지워진 회화나무
대웅전 뜨락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500년 이
상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귀신도 모를 정도로
장대한 나이를 먹은 그는 높이 26m, 둘레 4m로
뜨락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옛날
에는 회화나무가 군락을 이루던 곳으로 회화나
무 우물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허나 그 많던 회화나무는 20세기 이후 죄다 사
라졌으며, 나무 윗도리는 연등 구름에 가려 보
이질 않는다. 이렇게 보니 구름에 감싸인 신묘
한 나무처럼 보인다.

            ◀  조계사 8각10층석탑
대웅전 뜨락에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
석탑(국보 48호)을 유난히도 많이 닮은 8각10층
석탑이 자리해 있다.
조계사는 초창기부터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왜식 석탑이 있었다. 허나 왜식 탑이라 말들이
많자 2009년 가을 기존의 탑을 불교중앙박물관
북쪽으로 치우고 고려 탑의 진수로 꼽히는 월정
사 탑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탑을 세웠다.
탑 피부에는 8여래상, 8보살상, 8신중상 등을
새겼고, 왜식 탑에 들어있던 부처 사리 1과와
조그만 불상 14,000상을 봉안했다. 그 사리는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파라(達磨婆羅)가
기증한 것으로 그외에 논산 쌍계사(雙溪寺)에서
가져온 법화경 7권 1질과 25조 가사 1벌 등을
안치해 이 땅의 중심 사찰 석탑의 위엄을 갖추
었다.

  ◀  조계사 쉼터이자 야외까페인 가피(加被)
대웅전 뜨락 동남쪽에 늘씬한 키의 소나무가 여
럿 심어진 쉼터가 있다. 예전에는 그냥 허전한
공터였으나 조계사 신도회 부회장 오인석의 지
원으로 주변을 손질하여 2011년 4월 야외 까페
로 새로 태어났다.

이곳에 부여된 이름은 '가피'로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뜻이니 완전 사찰
까페에 맞는 이름이다.
(커피와 차는 2~4천원 선)


▲  한국불교 역사문화기념관 북쪽 산책로

조계사 북쪽에는 2005년에 세워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전국 2,000여
곳의 사찰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이 들어있으며, 지하 1층에는 2007년에
문을 연 불교중앙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이 박물관은 이 땅의 불교미술사를 정리하고 다른 절의
문화유산을 위탁 관리/보존하고 있는데, 관람료는 공짜이다. (특별전 제외)

* 불교중앙박물관 관람시간 : 9시~18시 <11~2월은 17시까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우정국로 55 ☎ 02-2011-1960)

     ◀  뒷전으로 밀려난 조계사 7층석탑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북쪽에는 조촐하게 산
책로가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면 왜열
도 스타일로 이루어진 길쭉한 탑을 만나게 되는
데, 그 탑이 대웅전 뜨락에 있던 조계사 7층석
탑이다.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바라가 부처의 사
리를 지참하며 천하의 불교 성지를 찾아 댕기다
가 그해 8월 조선까지 들어 왔다.
조선의 여러 절을 둘러보다가 기분이 너무 좋아
서 사리 1과를 선사했는데, 각황사에서 이를 관
리했다가 사리를 담을 탑이 필요하여 1930년 지
금의 왜식 7층석탑을 지어 그 안에 담았다.
2002년 3월 도량확장 불사로 탑을 옮겼을 때 사
리를 꺼내 친견법회를 봉행했으며, 사리함을 보
수하여 다시 안에 넣었다.

그 이후 왜식 탑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생기자 2009년에 오대산 월정사 8각9층석탑을 모델로 하여
왜식 탑을 대체할 8각10층석탑을 세웠다. 그래서 왜식 탑에 담긴 사리를 새 탑에 넣었고, 왜식
탑은 부시기에는 좀 아까워 그해 10월 인적이 별로 없는 응달진 구석에 자리에 처박아 두었다.
단지 왜식 탑이란 이유에서였다.


▲  7층석탑의 1층 부분 - 난간 무늬와 덩굴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탑을 구석진 곳에 두다보니 처음에는 탑을 완전 아작낸 줄 알았다. 아무리 왜식 탑이라 해도 그
들도 이 땅의 엄연한 역사이자 문화유산이다. 옛 조선총독부나 이 땅의 정기를 흐트리고자 꽂은
말뚝 등 심히 눈꼴사나운 것들은 정리해야 마땅하나 그외에 평범한 것들은 보존하여 관광/역사
자원으로 삼는 것이 좋다.
또한 이 탑은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조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외지에서 만든 것과 백
송, 회화나무는 제외) 각황사와 태고사 시절의 역사가 담겨진 만큼 부시지 않고 자리만 옮긴 것
은 착한 결정이라 본다. 구석에 있어 찾는 이도 별로 없지만 탑 주변에는 늘 꽃이 가득하여 관
리는 그런데로 해주는 모양이다.

이 땅에 거의 흔치 않은 왜식 탑으로 왜인이 만든 것이 아닌 조계사에서 만든 것이며, 가야(伽
倻)를 밀어내고 왜열도를 점유한 해양대국 백제(百濟)가 왜인들을 교화하고자 불교를 내리면서
그곳에도 불교가 활짝 꽃피게 되었다. 왜열도로 전해진 불교는 차차 그들만의 불교 스타일로 변
화해 갔고, 격동의 구한말 시절, 그들의 불교가 그 전래지인 조선으로 넘어와 왜식 불교가 잠시
성행을 한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 탑을 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문화란
다 돌고 도는 것이다.


▲  7층석탑 주변에서 만난 두툼한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조계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경내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장엄등이 슬슬 꿈
틀거리면서 연등회의 마지막인 연등놀이가 기지개를 켰다. 이후 내용은 생략~~~

※ 조계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안국동로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우정국로) 길로
  가면 조계사이다. (도보 6분)
* 조계사 경유 서울시내버스 노선
① 조계사 : 109번(우이동↔광화문), 151번(우이동↔중앙대), 162번(정릉동↔여의도), 172(하계
   동↔상암동), 606(부천시 상동↔종로1가), 1020(정릉동↔종로1가)
② 조계사 건너편 : 151, 162, 172, 401번(장지동↔광화문), 406번(개포동↔광화문), 704번(송
   추,부곡리↔서울역), 7022번(구산동↔서울역), 9401번(분당 오리역↔광화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조계사 홈페이지는 위에 불두화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8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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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5년 5월 1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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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5/05/26 15:35 | 서울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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