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신라 왕릉 나들이 ~ 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 경주 신라 왕릉 나들이 ~ 효소왕릉, 성덕왕릉 ♠

경주 성덕왕릉

▲  경주 성덕왕릉

성덕왕릉 석사자경주 효소왕릉

▲  성덕왕릉 석사자

▲  경주 효소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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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제국이 슬슬 맹위를 드러내던 6월 초, 부산(釜山)에서 포항(浦項)으로 올라가다가 그
길목에 자리한 경주에 잠시 발을 들였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지나친다고 경주를 그냥 지
나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거의 40여 회 가까이 발걸음을 한 경주 땅, 허나 여전히 미답지
가 즐비하고, 적지 않은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부담감이 좀 크다.
이번에 경주에서 문을 두드린 곳은 조양동(朝陽洞)에 자리한 신라시대 왕릉 2기이다. 조양동
은 시내와 불국사역 사이에 자리한 시골로 7번 국도가 지나가 교통 하나는 일품이다. 게다가
왕릉도 국도와 가까워 찾기도 쉽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인 모화(毛火)에서 경주좌석버스 600번(모화↔경주시외터미널)을 타고 한
국광고영상박물관에서 내리니 한자로 성덕왕릉입구를 알리는 표석과 성덕/효소왕릉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를 마중한다.

그들의 안내로 국도를 버리고 동쪽으로 들어가면 농가 뒤로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길(부
산↔포항)이 나온다. 그 철길을 건너면 바로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성덕왕릉과 효소왕릉에 이
르게 되는데 철길 앞에 '선로통행을 금하며 어길 경우 벌금에 처한다'는 무거운 내용의 경고
문이 서있어 나의 걸음을 잠시 얼어붙게 한다.


▲  성덕/효소왕릉으로 넘어가는 철길 건널목
철길을 건널 시 철도법 위반으로 몰아넣는다는 경고문이 나그네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  경주를 가르는 동해남부선
서울 청량리, 강릉, 포항, 동대구, 태화강, 부전 방면 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이곳을 스쳐간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왕릉 바로 옆에 철로가 깔린 것일까?
이는 왜정(倭政)이 신라 왕릉을 욕보이고 왕릉으로 통하는 맥을 끊고자
고의로 그렇게 닦은 것이다.


철길을 넘으면 바로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이다. 하지만 통행을 금한다는 경고문 앞에 나의 발
걸음은 자석처럼 붙어버렸다. 솔직히 그런 것을 잘 지키는 편도 아닌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안내문의 경고에 단단히 염통이 얼어붙은 듯 싶다. 하여 건널목 대신 한국광고영상박물관 뒤
쪽으로 이어진 농로로 길을 잡았다. 비록 조금은 돌아가더라도 그게 마음이 좀 편할 것 같고,
돌아가는 정도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농로를 100m 정도 진입하니 농가에서 노공(老公) 1명이 나온다. 그래서 그에게 이 길로 가면
성덕왕릉이 나오냐고 물으니 철길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며 동네 사람 모두 철길로 건너다닌
다고 그런다. 그래서 다시 원위치하여 철길을 건너니 오솔길이 성덕왕릉까지 놓여 있었고 왼
쪽으로 효소왕릉이 선명한 모습으로 눈짓을 보낸다.


♠  신라 효소왕의 능으로 막연히 전해오는 동그란 옛 무덤,
성덕왕릉과 나란히 자리한 경주 효소왕릉(孝昭王陵) - 사적 184호

조양동(한국광고영상박물관)에서 성덕왕릉 이정표를 따라 동해남부선 철길을 건너면 소나무 사
이로 동그란 봉토분(封土墳)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효소왕릉이라 전해오는 신라 고분이다. 높
이 4.3m, 지름 10.3m, 둘레는 57.5m로 능 주변에는 여름과 가을에 흔히 볼 수 있는 여린 꽃잎,
나무쑥갓(마가렛)이 가득하여 마치 소금이 흐드러지게 뿌려진 듯하다.

봉분(封墳)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약 1m 높이로 쌓아 호석(護石)을 둘렀으나 현재는 대부분 묻혀
있으며, 능 앞에 상석(床石)처럼 생긴 조그만 혼유석(魂遊石)이 있을 뿐 별다른 장식물이 없어
허전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봉분도 다른 신라 왕릉과 고분보다 작은 편이니 이곳이 과연 왕릉일
까? 고개마저 갸우뚱하게 한다.

경주 땅에 전하는 신라 왕릉은 오릉(五陵)과 무열왕릉(武烈王陵), 성덕왕릉, 흥덕왕릉, 괘릉(掛
陵, 원성왕릉)을 제외하고는 주인이 명확하지 않다. 한참 조상 찾기에 혈안이 된 조선 후기(18~
19세기), 신라 왕족의 후손인 경주박씨와 석씨, 김씨가 옛 기록을 멋대로 해석하여 그럴싸한 옛
무덤을 그들의 조상 묘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능 이름 앞에 전(傳)을 많이 붙었
다. 그렇다면 효소왕릉의 진위(眞僞)는 어떨까?
이곳 역시 그의 능으로 보기에는 100%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02년에 왕이
붕어(崩御)하자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효소왕릉은 망덕
사에서 동남쪽으로 5km나 떨어져 있어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망덕사터 동쪽에 있는
신문왕릉(神文王陵)을 효소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무덤에 효소왕릉이란 굴레가 강제로 씌워진 것일까? 무덤 동쪽에는 성덕왕
릉이 자리해 있는데, 그 성덕왕과 효소왕은 친형제로 모두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다. 성덕왕
릉은 기록과 비석을 통해 능의 주인이 확실한 몇 안되는 신라왕릉으로 마침 그 옆에 이름없는
옛 무덤이 하나 있던 것이다. 그래서 경주김씨 사람들은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
의 기록을 흔쾌히 무시하고 그 무덤을 성덕왕의 친형인 효소왕릉으로 삼아 이곳을 효소/성덕왕
형제의 능역(陵域)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효소왕릉이란 간판을 단 것은 1730년임)

효소왕릉은 1929년 4월 왜인들에게 도굴을 당했고, 1969년 11월에 또다시 도굴되는 아픔을 겪었
는데, 도굴범들은 그들이 쓰던 도구를 현장에 버리고 갔으며, 도굴로 인해 무덤 석실(石室)이
바깥에 노출되었다. 이때 확인된 석실의 규모는 길이 3m, 너비 150cm, 높이 150cm 크기로 왕릉
치고는 매우 작았으며, 부장품은 발견된 것이 없었다.


▲  효소왕릉 가는 길


※ 신라 32대 군주 효소왕(孝昭王 687~702 <재위 692~702>)
효소왕은 신문왕(재위 681~692)의 큰아들로 어머니는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 김씨이다. 휘(諱, 제왕의 이름)는 김이홍<(金理洪) 또는 김이공(金理恭)>이고 687년 2월에 태
어났는데, 그날은 날씨가 음침하고 어두웠으며 뇌성벽력이 심했다고 한다.
691년 3월 1일 태자(太子)로 책봉되었고, 692년 7월 부왕(신문왕)이 붕어하자 불과 5살의 나이
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당나라 여제(女帝)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가 사신을 보내 신문
왕의 붕어를 애도하며 제사를 지내고 태자를 신라왕으로 인정했다.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모후(母后)인 신목왕후가 섭정(攝政)을 했을 것이다. 왕이 아
무리 어려서부터 총기가 대단하다 한들 5살짜리가 국정을 살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선
대왕(문무왕, 신문왕)들이 왕권을 단단히 다져놓았고, 모후와 선왕의 충성스런 대신들이 어린
왕을 잘 보좌하며 국정을 돌봤기 때문에 재위 초반에는 별무리가 없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관부(官府)의 하나인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의 이름이 좌/우의방부(左/
右議方府)로 바뀌었다. 이는 관청의 이름에 왕의 이름인 '이(理)'가 있었기 때문으로 백성과 신
하, 관청은 제왕의 이름을 무조건 피해서 써야했다.
즉위 다음 달(692년 8월)에는 대아찬(大阿湌) 원선(元宣)을 중시(中侍)로 삼았으며, 고승 도증(
道證)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천문도(天文圖)를 바쳤다. 또한 이때 이후 의학(醫學)을 세우고 의
학박사 2명을 두었으며, 본초경(本草經)과 갑을경(甲乙經), 소문경(素問經), 침경(針經), 맥경(
脈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 등을 교육시켰다.

693년에는 문무왕(文武王) 시절에 세워진 장창당(長槍幢)을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이름을 바
꾸었다.

694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 신라의 시조를 모신 신궁)에 제를 올리고 죄수를 방면했고, 백
제와 고구려 정벌에 공이 큰 김문영(金文穎)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한편 당나라에 머물던 왕의
작은할아버지인 김인문(金仁問, 무열왕의 2번째 아들)이 66세의 나이로 죽자, 측천무후는 그의
시신을 신라로 보냈다. 이에 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고 695년에 무열왕릉 인
근 서악(西岳)에 장사를 지냈다.
겨울에는 서북쪽 변방인 송악(松岳, 경기도 개성)과 우잠(牛岑, 황해도 금천)에 성을 쌓았고,
신라의 동북쪽 끝인 비열주(比列州, 강원도 안변)에 1,180보 크기의 성을 쌓았다.

695년, 자월(子月)을 정월로 삼았으며, 김개원(金愷元)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서울
(이후 서울은 모두 신라의 수도인 경주임)에 지진이 났으며, 중시 김원선(金元宣)이 늙어서 관
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서울에 서시(西市)와 동시(東市), 2개의 시장을 설치해 상업을 장려하고,
이를 감독할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해 감(監) 2명, 대사(大舍) 2명을 두었다.

696년 정월, 이찬 김당원(金幢元)을 중시로 삼았으며, 4월에 서쪽 지방(전라도, 충청도 등)에
가뭄이 들었다.

697년 7월,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는데, 다른 밭고랑에서 난
이삭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이었다. 9월에는 임해전(臨海殿)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698년 정월, 이찬 체원(體元)을 우두주(牛頭州, 강원도 춘천)총관으로 삼았다. 2월에는 서울에
지진이 나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렸으며, 중시 김당원이 늙어 퇴직하자 대아찬 순원(
順元)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는 왜국(倭國)의 사신이 내조(來朝)하자 왕이 숭례전(崇禮殿)에서
그들의 하례를 받았으며, 7월 서울에 홍수가 났다.

699년 2월,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고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
였고, 7월에 동해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5일 만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닷물이 정말 핏빛
으로 변할리는 없을테니 아마도 왕을 노리는 커다란 역모가 있었음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9월
에는 동해바다 밑에서 지진이 났는데 그 소리가 서울까지 들렸고, 병기고(兵器庫)에서 북과 뿔
피리가 저절로 소리를 내었다고 하니 반란군들이 서울까지 침범했고, 서울에서 그들을 내응하는
세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후 신촌(新村) 사람 미힐(美肹)이 무게 100푼인 황금 한 덩이를 얻었는데, 그걸 왕에게 바쳤
다. 하여 왕은 그에게 남변제일(南邊第一)의 지위를 주고 벼 100섬을 내려주었다. 아마도 미힐
이 역모를 고변하거나 반란군 토벌에 큰 공을 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700년, 다시 인월(寅月)을 정월로 삼았다. 5월에 이찬 경영(慶永)이 모반을 꾀하다가 처단되었
으며, 중시 순원이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모반 이유는 그동안 왕권에 눌려 지내던 진골 귀족들
이 어린 왕을 만만히보고 일을 벌인 것으로 여겨지며, 6월에 모후인 신목왕후가 죽었다. 바로
그달 세성(歲星)이 달을 침범하였다.

701년 2월, 혜성이 달을 범했으며, 5월에는 영암군(靈巖郡, 전남 영암) 태수 일길찬 제일(諸逸)
이 공사를 저버리고 사사로운 이익을 꾀했으므로, 곤장 100대를 치고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

702년 7월, 왕이 15세의 나이로 붕어(병으로 죽은 듯 함)하니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
(望德寺)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는 아들과 왕후(기록이 없음)가 없어 친동생인 김융기(金隆
基, 성덕왕)가 뒤를 이었다.
왕이 승하하자 측천무후는 크게 애통해하며 2일간 정사(政事)를 폐하고 사신을 보내 조의를 표
했다.

* 효소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산8
* 관람시간 제한없음


♠  12지신상과 석인, 석수를 모두 갖춘 신라 최초의 왕릉,
신라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룬 경주 성덕왕릉(聖德王陵) - 사적 28호

▲  성덕왕릉 정면

효소왕릉 동쪽 소나무 숲 사이로 제법 품격을 갖춘 왕릉 하나가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바로 효
소왕의 아우인 성덕왕의 능이다. 그 앞 들판에는 그의 능비(陵碑)로 전해지는 귀부가 조용히 웅
크리고 있으며, 효소왕릉에서 성덕왕릉으로 가는 길은 솔내음이 깃든 소나무 숲길로 고향의 오
솔길처럼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  성덕왕릉 좌측

성덕왕릉은 동그란 봉토분(封土墳)으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석인(石人), 석수(石獸, 돌로
만든 동물상)를 모두 갖춘 이 땅 최초의 무덤이자 신라 최초의 왕릉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주인
이 명확하지 않은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과 김유신(金庾信) 묘를 제외하면 어쩌면 12지신상을
처음으로 두룬 신라 왕릉일 수도 있겠으며, 석인과 석수 역시 성덕왕릉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신라의 무덤은 별장식도 없는 동그란 흙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무열왕 시절 당나라
에 아부하며 대륙 문물에 크게 호기심을 보였는데, 무덤 양식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무열왕릉
부터 당나라의 묘제(墓制)를 적용하게 된다. 그렇게 신라의 무덤 양식은 기존 양식에 당나라 양
식을 더해 서서히 변해갔고 그 양식이 완성기에 이른 것이 바로 성덕왕릉과 흥덕왕릉, 괘릉이다.

▲  성덕왕릉의 아랫도리 (능 아래를 두룬 호석과 능 주변을 빙빙 휘감은 회랑과 돌난간)

봉분의 높이는 4.5m, 지름은 14.65m에 이르며 무덤의 내부는 석실과 현도(玄道)를 갖춘 굴식돌
방무덤이다. 능 아래를 두룬 호석은 신문왕릉의 호석 구조에서 좀 더 발전한 형식으로 높이 90
㎝ 정도의 판석(板石)을 면석(面石)으로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甲石)을 올렸다.
그리고 면석(面石) 사이로 탱주(撑柱)라 불리는 기둥을 세워 고정시켰고, 바깥쪽에 3각형의 돌
을 세워 능을 지탱하게 하였다. 호석 밖에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 왕릉과 돌난간 사이 부분)
을 설치하고 회랑 밖으로 돌기둥을 세워 2중으로 돌난간을 둘렀으며, 33개에 이르는 난간의 석
주에는 상하 2개소에 관석(貫石)을 끼우는 원공(圓孔)이 있으나 관석은 남아있지 않다.

▲▼  성덕왕릉을 지키는 12지신상의 위엄

호석의 3각형 받침돌 사이로 왕릉을 지키는 12지신상이 자리해 있다. 12지신상을 갖춘 다른 신
라 왕릉과 달리 호석에 새기지 있지 않고 별도의 조각으로 배치된 점이 큰 특징인데, 네모난 돌
위에 서 있는 그들은 신라 무장(武將)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것으로 칼 등의 무기를 차고 갑옷까
지 갖추며 왕릉으로서의 엄숙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하지만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도굴꾼
의 마수로 1개를 빼고는 모조리 목이 달아나고 없으며, 훼손이 심해 12지신의 방위(方位)를 계
산하지 않고선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힘들다.


▲  왕릉 앞에 놓인 거대한 석상(石床)

왕릉 앞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진 커다란 석상이 놓여져 있다. 이 석상은 제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거나 향을 피우는 용도로 사용되며 석상 밑에 판석이 방석처럼 깔려 있다.


▲  왕릉 좌측의 무인석(武人石)과 석사자

푸른 잔디가 수북히 입혀진 왕릉 앞쪽에는 무인석과 상반신만 남은 석인, 그리고 석사자가 배치
되어 있다. 석사자는 능역(陵域) 네 모서리에 1기씩 4기가 있어 능을 에워싸고 있으며, 석인은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이 서로 마주보며 각각 1쌍씩 서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2개만 전
한다. 이들은 왕릉을 수호하고 능의 품격을 높이고자 만든 것으로 당나라 묘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왕릉 좌측에 자리한 무인석은 1,270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하게 남아있
어 신라 무인의 복장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소 무서운 표정을 지은 그는 네모난 기단(基壇) 위
에 의장용 갑옷인 양당개를 입고 양손으로 칼을 짚고 있으며, 그의 왼쪽에는 강아지처럼 귀여움
이 묻어난 석사자가 앉아있는데 세월과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속에 훼손이 좀 있긴 해도 눈과
코, 입은 식별이 가능하다.


▲  왕릉 우측의 머리와 어깨만 남은 석인과 석사자

왕릉 우측에는 상체만 남은 석인과 온전한 모습의 석사자가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해 있다. 석
사자는 좌측의 그것보다 상태가 좋으며, 입을 다물고 있는 그의 표정에선 무서움보다는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싶은 모습인데, 앉아있는 자세는 꼬리를 살랑거리는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는 듯
하다. 석인은 세월의 고속 질주 속에 형편없이 녹아내려 상반신만 간신히 남아있다. 하여 그가
무인석인지 문인석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며, 얼굴도 목부분과 머리, 귀를 제외하고는 형체를 확
인하기도 어렵다.


▲  성덕왕릉 귀부의 원경(遠景)

그럼 성덕왕릉의 진위는 어떨까? 과연 그의 능이 맞을까? 삼국사기에는 왕이 붕어하자 이거사(
移車寺)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럼 이거사는 어디에 있을까? 성덕왕릉 북쪽에 쓰러진
탑이 있는 절터가 있는데, 그곳을 이거사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에서는 경주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능이 있다고 하는데, 도
지곡리는 지금의 도지리로 왕릉 서쪽에 있는 동네이다. 그러니까 역사기록과 지금의 왕릉은 그
런데로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왕릉 앞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도 전해오는데, 마침 능 앞에 비
석의 흔적인 귀부가 남아있어 이곳이 성덕왕릉임을 그런데로 드러낸다.



▲  성덕왕릉 귀부(龜趺)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96호

성덕왕릉 앞 들판에는 그의 비석이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육중한 귀부가 여기저기 무거운 상처
를 가득 안은 채 땅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귀부 위에는 왕의 생애와 치적이 가득 담겼을 비신(
碑身)이, 그 위에는 이무기 2마리가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다룬 이수(螭首)가
있었을 것이다. 허나 어느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 앞에 형체도 없이 휩쓸려
사라지고 성한 구석이 거의 없는 귀부 만이 남아 흘러간 세월을 원망하며 장엄했을 옛 모습을
그리워한다.
신라 왕릉에서 비석을 갖춘 능은 무열왕릉과 성덕왕릉 뿐으로 이 역시 당나라의 무덤 양식을 반
영한 것이다. 무열왕릉과 더불어 비석까지 갖출 정도면 성덕왕의 공덕이 무열왕과 거의 비슷한
수준임을 보여주며, 귀부 주변에서 깨진 비석 조각을 여럿 수습했으나 대부분 무늬가 없고, 판
독된 글씨는 '武'와 '跡(적)' 2자 뿐이다.


▲  비석이 심어져 있던 네모난 비좌(碑座)

귀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네모난 석축 위에 있는데 귀부의 머리인 귀두(龜頭)는 절단되어 없
어지고 부러진 목 아랫부분만 쓰라리게 남아있다. 지금이라도 엉금엉금 움직일 것 같은 앞발에
는 5개의 발톱이, 뒷발에는 1개가 적은 4개의 발톱이 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형의 등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등 중앙에는 비석을 심었던 네모난 비좌(碑座)가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
고 있다.
등무늬와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8세기 중엽 신라시대 비석으로 비록 건강이 많이 안좋긴 하
지만 그 시절 귀부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이다.

※ 신라 33대 군주. 성덕왕(聖德王 ?~737 <재위 702~737>)
성덕왕은 신문왕과 신목왕후 김씨의 아들로 효소왕의 친아우이다. 원래 이름은 김융기(金隆基)
였으나 당나라 현종(玄宗)과 이름이 같아서 나중에 흥광(興光)으로 이름을 갈았다. <또는 김지
성(金志誠)이었다고 함>
702년 7월 효소왕이 붕어하자 진골 귀족들이 화백(和白)회의를 열어 그를 왕위에 세웠다. 그의
나이는 불과 10대 초반(많으면 14살)이었다.

702년 9월, 민심 수습과 신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리들의 관작
을 1단계씩 올려주었으며, 여러 지역의 조세를 1년간 면제했다. 또한 아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으며, 10월에는 삽량주(歃良州, 경남 양산)에서 도토리가 밤으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703년 정월, 신궁(神宮)에 제를 지냈으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선물했다. 7월에 영
묘사(靈廟寺)에 불이 나고 서울에 홍수가 나서 죽은 이가 속출했다. 중시 원훈이 관직에서 물
러나자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 또한 왜국에서 204명에 이르는 사신단을 파견했으며,
아찬 김사양(金思讓)을 당나라에 보냈다.

704년 정월, 웅천주(충남 공주)에서 금빛 영지를 바쳤고, 3월에 당나라에 갔던 김사양이 돌아와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바쳤다. 5월에는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왕비(성정왕후)로
삼았다.

705년 정월, 중시 원문이 사망하여 아찬 신정(信貞)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으며, 5월에 가뭄이 들었다. 8월에는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렸고, 9월에 살생을
금하는 조서를 내렸다. 10월에 동쪽 지방에 흉년이 들자 왕은 사람을 보내 백성을 구제했다.

706년 정월, 이찬 인품(仁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나라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
제했고, 3월에 뭇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8월에 중시 신정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면서 대아찬
김문량(金文良)을 중시로 삼았다. 8월과 10월 당나라에 조공을 했고, 12월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707년 정월, 전년 흉년으로 백성들이 많이 굶어죽자 1명당 하루 좁쌀 3되씩을 7월까지 나눠주었
으며, 2월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달랬다. 또한 백성들에게 5곡 종자를 어려운 정도에 따라 차
등있게 나눠주었다.

708년 정월, 사벌주(경북 상주)에서 상서로운 식물(금잔디)을 바쳤다. 2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4월 진성(鎭星, 토성)이 달을 범하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709년 3월, 청주(菁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5월에 가뭄이 들었고, 8월에 죄인들을 사면했다.

710년 정월, 천구성(天狗星)이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떨어졌다. 지진이 나자 죄인을 사면했다.

711년 3월, 봄인데도 눈이 많이 내렸다. 5월에 짐승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했으며, 10월에 왕
이 직접 남쪽 지방을 시찰했는데, 이때 중시 김문량이 죽었다. 11월에는 친히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군신에게 보였다. 백관잠의 내용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으나 신하들이 지켜야 될 덕목들을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712년 3월,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당나라 현종이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
왕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유는 당 현종의 이름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중으로 이
름을 갈았다. 4월에 온천에 행차했으며, 8월에 김유신의 처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
식 1천 석을 주었다.

713년 2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했다. 당나라에 김정종(金貞宗)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했는
데, 당 현종이 문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다. 10월 중시 위문이 나이가 많아 퇴직을 청하자
승낙했으며, 12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개성(開城)을 쌓았다.

714년 정월, 이찬 효정(孝貞)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상문사(詳文師)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
쳐 표문(表文)을 쓰는 일을 맡게 했으며,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어 크게 관심을 보이며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급찬 박유(朴裕)를 당나라에 보내 새해 인사까지 하니 현종은 기분이 좋아 조산대부(朝
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여름에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가을에 삽량주에서 도토리가 또 밤으로 변했다. 10월에
당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재상과 4품 이상급의 신라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715년 4월, 청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으며, 5월에 죄수를 사면했다. 6월에 크게 가뭄이 들자 왕
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에 살고 있는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가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했더니,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9월에 태백(太白, 금성)이 서자성(庶子星)을 가렸고, 10월에 유성이 자미(紫微)성좌를 침범하였
다. 12월에는 유성이 천창(天倉)으로부터 태미(太微)성좌로 들어갔고, 이때 죄인들을 사면하면
서 왕자 중경(重慶)을 태자로 책봉했다.

716년 정월, 유성이 달을 범해 달빛이 없어졌으며, 3월 성정왕후를 궁밖으로 내보냈다. 전년 하
반기에 일어났던 여러 번의 천문 현상을 통해 외척 세력과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외척의 세력을 꺾을 요량으로 태자의 생모를 폐위하고 내쫓은 것이다. 그래도 12년을 같
이 산 부인인지라 채색 비단 500필, 밭 200결, 벼 10,000섬과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구입하
여 하사했다. 얼마 뒤 커다란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라갔으며, 숭례전(崇禮殿)이
무너졌다. 아마도 외척들이 모반을 꾀하면서 숭례전이 손상된 것이 아닐까 싶다.
6월 가뭄이 들자, 거사 이효를 다시 불러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왔으며, 죄인들을 사면했다.

717년 2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筭博士)를 각각 1명씩 두었다. 3월에 새로 궁궐을 지었으
며, 4월에 지진이 났다. 6월에는 태자 중경이 어린 나이에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
9월에 당나라에서 왕자 김수충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공자)과 10철(十哲), 72제자의 초상화
를 바쳤다. 그래서 그것들을 대학(大學)에 안치하여 유학을 더욱 장려했다.

718년 정월, 중시 효정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파진찬 사공(思恭)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왕이
직접 서쪽 지방을 시찰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노인들을 몸
소 위로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물건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6월에 황룡사(皇龍寺) 탑에 벼락이 떨어졌으며,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를 만들었다. 10월
에 유성이 묘(昴)성좌에서 규(奎)성좌로 들어가고,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뒤따랐으며, 천구성(
天狗星)이 동북방에 떨어졌다. 그리고 한산주(漢山州)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

719년 9월, 금마군(金馬郡, 전북 익산) 미륵사(彌勒寺)에 벼락이 떨어졌다.

720년 정월, 지진이 났다. 상대등 인품이 죽자 대아찬 배부(裵賦)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3월
에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딸을 왕비(소덕왕후)로 맞이했다. (그해 6월 왕후로 봉함)
4월에 큰 비가 내려 산 13곳이 무너졌고, 우박까지 떨어져 볏모가 상했다. 5월에 해골을 땅에
묻게 했으며, 완산주와 웅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가을에 메뚜기들이 창궐하여 곡식을 해치
자 중시 사공이 그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니 파진찬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았다.

721년 7월, 하슬라(何瑟羅, 강원도 강릉 지역) 지방의 장정 2,000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
성(長城)을 쌓았다. 발해의 칩입에 대비하고자 그런 듯 싶다.

722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자 이찬 선종(宣宗)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서울에 지진이 났으며,
8월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다. (우리나라 사회경제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부분으로
정전은 나라가 백성에게 토지를 직접 지급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에 대해 나
라가 인정한 것을 뜻함) 10월에 모벌군성(毛伐群城, 경주시 외동읍)을 축성했다.

723년 3월, 당나라에 더욱 잘보이고자 미녀 2명을 선물로 보냈다. 이들은 나마(奈麻) 김천승(金
天承)의 딸인 포정(抱貞)과 김충훈(金忠訓)의 딸인 정완(貞菀)으로 모두 왕의 고종사촌인데, 의
복과 그릇, 노비, 수레, 말 등을 딸려 보내 예를 보이니 당 현종이 무안해하며 후하게 선물까지
딸려 돌려보냈다. 허나 정완의 비석에는 742년<천보(天寶) 원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나와있
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는 모르겠다.
4월에는 당나라에 과하마(果下馬) 1필과 우황, 인삼, 머리 장식,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
紬), 매를 아로새긴 방울, 바다표범 가죽, 금, 은을 조공으로 보내며 간지나게 아부를 떨었다.
이때 당나라로 국서를 보내
'우리 신라는 바다 구석진 곳 먼 귀퉁이에 있어서 본래부터 천주(泉州) 상인의 진귀한 보배도
없고 남만인(南蠻人)의 귀한 재화도 없어서 감히 우리 토산물로 당 황제의 관청을 더럽히고 노
둔한 말로 황제의 마구간을 더럽히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동에서 흰 돼지를 바친 일과
같고, 초나라의 닭과 비슷하니 참으로 부끄럽고 떨리며 진땀이 흐를 뿐이다'

724년 봄,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고 죄수를 사면했다. 웅천주에서 상서로운 식물을 바쳤다. 2월
에 김무훈(金武勳)을 당에 보내 조공을 했는데, 당 현종이 기뻐하며 온갖 비단 2,000필을 답례
로 보냈다. 12월에는 소덕왕후(炤德王后)가 죽었다. (이후 왕은 왕후도 없이 혼자서 지냄)

725년 정월, 일곱 색깔 무지개도 아닌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늦봄인 3월에 난데없이 눈이 내렸
고, 4월에 우박이 떨어졌다. 이에 중시 선종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이찬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10월에는 지진이 발생했다.

727년 정월, 죄인을 사면했으며, 4월에 일길찬(一吉粲) 위원(魏元)을 대아찬으로 삼고 급찬 대
양(大讓)을 사찬으로 삼았다. 12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했으며, 상대등 배부가 늙어 물러나
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궤장(机杖)을 하사했다.

728년 7월, 왕의 아우인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신라 귀족들의 자제를 당나
라 국학(國學)에 입학시켜줄 것을 청하니, 당 현종이 이를 허락하면서 김사종에게 과의(果毅)의
관작을 주어 당나라에서 숙위(宿衛)케 했다. 상대등 배부가 다시 물러나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
하고 이찬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730년 2월, 왕족 김지만(金志滿)을 당나라에 보내 작은 말 5필, 개 1마리, 금 2,000냥, 머리카
락 80냥,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조공했다. 이에 당현종이 김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00필, 자줏빛 두루마기, 비단 띠를 주며 숙위하게 하였다.

731년 2월, 김지량(金志良)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당현종이 채색비단 500필, 무늬없는 비
단 2,500필을 답례로 보냈다. 4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또한 왜
국이 수군 300척을 보내 동해바다를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9월에는 백관들을 적문
(的門)에 모이게 하여 수레에 달린 쇠뇌를 테스트했다. 신라는 활과 쇠뇌
를 잘만들었는데, 아마도 새로운 형태의 쇠뇌를 개발한 모양이다.

732년
12월,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貞宗), 윤충, 사인(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733년 7월, 발해(渤海) 2대 군주인 무왕(武王)은 당나라를 위협하고자 장문휴(張文休)를 장군으
로 삼아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등주(登州)를 공격했다. 발해군은 등주를 쑥대밭으
로 만들고 등주자사 위준을 죽였는데, 이에 뚜껑이 뒤집힌 당 현종은 급히 군사를 보냈으나 발
해군은 그들이 오기 전에 유유히 바다를 건너 회군했다.
발해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당 현종은 당나라에 머물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
을 급히 신라로 보내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왕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金
允中)을 대장으로 삼아 발해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한 길이 넘게 내려 산길이 막히고 강
추위로 죽는 병사가 속출하여 별다른 소득도 없이 철수했다. 아마도 함경남도 개마고원(蓋馬高
原)까지 진군했다가 후퇴한 듯 싶다.
12월에 왕이 조카 김지렴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다. 이에 앞서 당현종이 흰 앵무새 암수 1
쌍과 자주색 비단에 수를 놓은 두루마기와 금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의 비단, 오색
으로 물들인 비단 300여 단을 보내주었는데, 그 답례로 당 현종을 격하게 찬양하고 아부하는 내
용의 국서를 보낸 것이다. 그 국서를 받은 현종은 기분이 좋아 김지렴을 내전에서 대접하고 비
단을 내렸다.


734년 정월,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경우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진
언하도록 했다.

735년 정월, 형혹(熒惑, 화성)이 달을 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는
데, 당현종은 앞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땅으로 인정했다. 허나 신라는 이미 패강과 원산 지역까지 점유하고 있던 상태였고, 그
이북은 발해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당나라가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 땅으로 공식 인정하자(삼국사기에는 땅을 주었다고 나
옴) 왕은 무한 감동을 받으며 736년 6월 당 현종에게 국서를 보내 뼈가 부서지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다며 심히 역겨운 아부를 떨었다.

736년 11월, 왕의 종제(從弟)인 대아찬 김상(金相)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에 당 현종이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북쪽 변경으로 보내 평양(平壤)과 우두(牛頭州, 강원도 춘천)의 지형를 조사하게
했으며, 난데없이 개가 궁성 누각에 올라가 3일간을 짖었다.

737년 2월, 사찬 김포질(金抱質)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했으며, 바로 그달 왕은 붕어했다. 이
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성덕왕 시절은 정치/경제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는 적극적
인 위민정책(爲民政策)으로 백성을 보살폈으며, 자주 순행을 나가 민생을 살피고 어려운 백성들
에게 곡식과 생필품을 하사했다. 또한 죄인에 대한 사면령도 수시로 단행을 했는데, 신라의 역
대 제왕 가운데 가장 많았다. 그리고 백성들이 마음껏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당나라의 균전제(
均田制)를 본받아 정전제를 실시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이를 통해 신라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루던 시기로 널리 칭송받고 있다.

성덕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회의의 대표인 상대등의 영향력을 줄여 상징적인 존재로 축소시
키고 대신 집사부(執事部)의 중시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중시는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
에 따라 편의에 따라 교체가 가능하여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유교를 장려하고자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10대 제자상 등을 국학에 봉안했고, 721년에
내성 기구 속에 소내학생(所內學生)을 두어 장차 문한계통에서 일할 인재들을 양성했다. 그리고
불교에도 크게 관심을 두어 '전광대왕(典光大王)'이란 불교식 왕명까지 지녔으며, 무열왕을 기
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봉덕사(奉德寺) 등의 성전사원(成典寺院)을 건립했다.


또한 문무왕 이후, 많이 소홀해진 당나라에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펼쳐 35년의 재위기간 동안 무
려 46회나 사신을 보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와 백제의 속방이자 별채였던 왜국
등 주변 나라와도 사이가 좋지 못해 부득이 당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당 역시 무섭게
팽창하는 발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신라가 필요해 두 나라는 다시 호감적인 사이가 되었다.
당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유학생을 파견해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게 했고, 당의 선진문물과 정
책을 적극적으로 수입했던 것이다. 허나 지나치면 모자른 것만 못하다고 그의 친당정책은 너무
아부적인 감이 커 당에 과하게 조공을 하는 풍조가 심해지고 심지어 왕실 여인을 당 현종에게
진상하려고까지 했다. 그것이 바로 당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나라, 신라의 어쩔 수 없는 한계점
이었다.

발해는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733년 발해 남쪽을 공격한 것 외에는 딱히 없으며, 왜국과는 서로
사신을 보내는 등의 교류가 있었으나 왜국 입장에서는 그들의 모국(母國)인 백제를 멸망시킨 원
수다보니 그렇게 시원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왜는 731년 수군 300척으로 신라 동해바다를
공격했으나 크게 깨졌고, 이에 자신만만해진 신라가 735년 왜로 사신을 보내
'신라는 어제의 신라가 아니다. 이름도 왕성국(王城國)으로 고쳤다'며 왜를 위협하니 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여 737년 2월에는 신라를 공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상황이 좋지 못
해 실현되진 못했다.


※ 경주 성덕왕릉, 효소왕릉 찾아가기 (2014년 12월 기준)
① 경주까지
* 서울역,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 부산역에서 경부선 고속전철을 타고 신경주역
  하차
* 서울 청량리역, 원주역, 제천역, 강릉역, 철암역, 영주역, 동대구역, 포항역, 부전역, 태화강
  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
  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수원, 안산, 성남, 하남, 춘천, 강릉, 천안, 대전(복합), 전주, 광주, 구
  미, 대구(서부, 북부, 동부, 동대구), 울산, 부산, 창원(마산), 진주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
  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 건너편(경주우체국 앞)에서 11, 600
  번 계열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한국광고영상박물관 하차, 길 건너편(박물관 방면)으로 건너가
  서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효소/성덕왕릉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신경주역에서 갈 경우에는 경주시내로 나가는 50, 51, 60, 61, 70, 203, 700번 시내버스를 타
  고 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 경주우체국 앞에서 11, 600번 계열 시
  내버스로 환승한다.
③ 승용차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배반4거리에서 우회전 → 한국광고영상박물관
  앞 교차로에서 박물관 주차장으로 좌회전 (주차는 영상박물관이나 주변 공터 이용)

* 성덕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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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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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2월 2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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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5/01/01 22:15 | 경북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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