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탄신일 산사 나들이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석가탄신일 맞이 산사 나들이 ~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약사전 (석조승가대사좌상)승가사 호국보탑

▲  승가사 약사전

▲  호국보탑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도 등라(藤蘿) 휘어잡네
처마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명 높은 스님 있어 공(空)한 것 보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 조선 초기 문신 정인지(鄭麟趾)가 승가사에서 지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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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공휴일의 하나인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이 드디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초파일은 주말
과 겹쳐서 자연스럽게 여러 날 연휴가 형성되었는데, 초파일이 그 연휴의 끝이었다. 그래서 초
파일 전날에 사전 몸풀기용으로 서울에 있는 적당한 고찰을 물색하다가 가본지 20년이 넘은 북
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기로 했다.

해가 조금씩 고개가 꺾이던 오후 2시에 길음역에서 후배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
고지↔신설동)을 타고 북악터널, 평창동을 지나 구기동(舊基洞)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졸부
들의 집과 빌라로 경관이 꼬질꼬질해진 구기동계곡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탐방지원센터가 나
오며, 이곳을 지나면 비로소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된다.
구기동은 옆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더불어 북한산 자락에 안겨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게다가
명당(明堂)의 기질도 있다고 전해져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졸부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살았는
데, 문제는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어 쥐처럼 계속 북한산(삼각산)의 살을 갉아먹고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경관이 적지 않게 유린을 당했다.
더 이상 졸부들로 인해 북한산이 망가지지 않도록 신축/증축을 금하는 한편, 기존 집들도 모두
밀어버려 서울의 영원한 허파이자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숨통을 확 트이게 했으면 좋겠다.

구기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졸부들의 집과 무자비한 개발의 칼질에 기가 죽은 구기동계곡도 슬
슬 본성을 되찾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숲도 더욱 짙어져 때이른 더위를 잊게 만
든다. 그런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갈림길인데, 여기서 직진하면 문수암(文殊庵)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으로 이어지며, 왼쪽으로 가면 승가사와 비봉이다.
우리는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김밥과 과자, 음료수 등으로 배를 채운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꿀을 바른 듯 죄다 꿀맛이다. 우리가 사온 김
밥은 모두 5줄인데, 이중 4줄을 먹었고, 과자와 음료수도 절반 정도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복이
일파만파로 몰려와 우리를 희롱한다. 그 희롱에 잠시 무방비로 있다가 자리를 싹 털고 다시 길
을 재촉했다. 승가사까지는 30분을 더 가야되기 때문이다.

구기갈림길에서 승가사까지는 경사가 좀 각박한 편이나, 구기동계곡의 상류인 승가사계곡이 바
로 옆에서 시원한 바람과 냇물로 응원하고 있어 그리힘들지는 않다. 그 산길을 25분 정도 오르
면 승가사 갈림길에 이른다.


▲  승가사 갈림길 - 왼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모두 승가사로 통한다.
(사람은 왼쪽 계단길 추천, 오른쪽 길은 수레를 위한 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로 치장된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갈림길에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사의 내력과 가람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무
려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주변이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거
를 당했던 비운의 문이기도 하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하여 지금의 문을 두었으며,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호국보탑까지는 숨가쁜 계단길의 연속이다. 연등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르면
청운교(靑雲橋)라 불리는 장대한 계단이 기를 질리게 만드는데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
事蹟碑)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는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계단길 (내려갈 때 찍은 모습)
계단 왼쪽에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이 승가사 사적비이다.

▲  감실 불당까지 갖춘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서 있는 호국보탑 앞에서 다시 한번 주
눅이 든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이었음을 속
세에 강조하면서 조국 통일도 염원하고 절의 위세도 크게 강조하고자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것이
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참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
던 허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서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
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씩 재현했
고 사방(四方)에 문을 냈다.
감실 안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키
도록 했다. 감실이 매우 좁기 때문에 승려만 들어가서 예불을 올리며, 탑 주위로는 문수/보현동
자상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다.

탑신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漢)
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9층탑 99기, 화엄경(華嚴經
)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큰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몇백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르니 미리 봐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민족통일호국보탑 공덕비

▲  위에서 바라본 호국보탑의 위엄


▲  호국보탑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北岳山, 사진 중앙에 엷게 보이는 산줄기)과 인왕산(오른쪽), 그들 너머로
서울 도심이 어렴풋이 바라보인다.

▲  산자락에 요새처럼 자리한 승가사 - 호국보탑에서 올려다본 모습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
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은 옛길이다. (옛길로 가면 포대화상을 만
날 수 있음)


♠  북한산 제일의 고찰이자 서울 근교 명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
고려시대 보물 2개를 간직한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

▲  산신각에서 바라본 승가사 경내 (대웅전 구역)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이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국보 3호)가 서있던 비봉(碑峰)
동쪽 45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승가사는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많은 문인(文人)들이 찾아와
안긴 명소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쪽의 진관사(津寬寺),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산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찬양을 받았다.

북한산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승가사는 756년(신라 경덕왕 14년)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
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에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로 칭송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
)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 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
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
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
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고려의 천하로 바뀐 이후,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
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선종(宣宗)의 칙령(勅令)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
숙종 3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宗)과 함께 세검정에 있던 장의사(藏義
寺)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속하
게 되었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여기까지 기어올라온
청나라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5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780년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절터에 뒹굴던 돌을 골라
건물을 재건했으며, 구한말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으로 절을 수리했다.

1941년 도공(道空)이 중수를 벌였고,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려나갔으나 6.25때 모두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다가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 등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켰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
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7년 동안 갈고 닦아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
리는 등, 왕년의 위엄을 되찾고자 열심히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신없이 건물을 지었으며, 비
록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적묵당, 승가굴을 개조한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
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시대에 거대한 마애불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과 역시 고려 때 조성된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밖에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碑座),
그리고 경내 동쪽에 조선 후기 승탑 등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주변 풍경이 빼어나 고려
와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元淳)은 이곳의 풍경을 8줄의 시로 표현하고 있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고 하늘과도 가까워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
오기 힘들며, (번뇌는 절 밑에서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다. 또한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공기도 청정하며,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거기에 보물급 문화재를 2점이나 품고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비구니의 낭낭한 불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해탈의 기분마저 들게 한다.


▲  나무 장작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서래당 공양간 부뚜막
이제는 시골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그리운 풍경으로 서울에서 저런 풍경을 만나니
무지 신선하고 반갑다. 쇠솥 안에서 모락모락 익고 있는 국의 맛은 어떨까?
나도 모르게 입 안에 군침이 고인다.


※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6호
  선 역촌역(3번 출구)에서 7212번 시내버스(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
  나 승가사입구 하차, 승가사까지 도보 약 70분, 현대빌라에서 구기동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것
  이 좀 무난하며, 승가사입구에서 비봉4길(건덕아파트)과 승가산림초소를 거쳐 가는 수레길은
  경사가 좀 각박하다.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은평차고지↔이북5도청)를 타고 현대빌
  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승가사까지 수레길이 닦여 있으나 길이 험하고 상태가 넉넉치 못하며, 일반 차량은 출입을 통
  제한다. (승가사와 국립공원 차량만 통행 가능)
* 승가사 셔틀차량을 이용하면 보다 편리하게 승가사까지 올라갈 수 있다. <승가사입구 정류장
  에서 동북쪽으로 난 비봉4길(승가사 방면)을 오르면 셔틀 타는 곳이 있음, 운행 정보는 승가
  사에 문의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 02-379-2996)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에
는 서래당(西來堂), 동쪽에는 적묵당(寂默堂)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뜨락에 들어서니 서래당
앞에서 연등 주문을 받는 아줌마 보살이 밝은 표정을 내비치며 연등 하나 다시라고 그런다. 허
나 연등 시주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가난한 중생이라 돈이 없다고 답을 하니 표정이 180도 싹
바뀐다. 결국 여기도 돈이 갑 중의 갑(甲)이던가? 잠시나마 씁쓸한 기분이 나를 엄습한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지어서 1980
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전생(全生)을 그린 전생도와 심우도가 그
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6년에 중창되었다. 겉
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
을 공양(供養)으로 제공하는데, 산꾼과 답사객, 신도 등 누구나 먹고 갈 수 있다.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비구니의 선방(禪房)
이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랗
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랫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이며,
윗층은 범종각으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인 점이 눈길을 끈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4발 수레가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
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비구니가 잠든 종을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리가 매우 은은하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불과 후불탱화

대웅전 내부는 모조리 개금(改金)을 한 목각(木刻)탱화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봉
안된 석가불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된 표정
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에는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도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운 금동
후불탱을 배치하여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나한의 일원으로 천태산(天台山)에서
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가
새겨진 독성탱(獨聖幀)

▲  칠성탱(七星幀)과 신중탱(神衆幀)
이들은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1985년과
1986년에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좌측 벽에 그려진 전생도의 일부 -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다보니 물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다.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승가사 산신각, 약사전 주변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불을 비롯해 석
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부감과 식
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화는 1987년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영산전 불단
석가불과 미륵불(미래불), 제화갈라보살(과거불)이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무려 경주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

▲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이 새겨진 16나한탱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을 봉안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으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이 있는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산신각에 올라 동쪽(좌측) 밑을 잘 살펴보면 길쭉한 석종형(石鐘形) 승탑과 비석 1기가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1780년에 쓰러진 승가사를 재건한 성월선사(城月禪師)의 탑과 탑비로 비문
에는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序(비명병서)'라 쓰여 있어 승탑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는
데,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를 받은 것이 이채롭다. 그리고 '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 이
란 내용도 있어 1802년 8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여래좌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
계 오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을 만나게 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불전(佛殿)으로 1972
년에 착공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
라 공사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를 한데 몰아 넣은 지장탱화가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
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혔다는 것이다.


▲  명부전 지장탱화 - 명부전에서 지장탱화만 달랑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옛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채 놓여져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塔身)이 겨우 한 덩이씩만 남았다. 탑신이 지
붕돌보다 큰 것을 보면 아마도 제일 아랫층 탑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
은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며,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저들이 온몸으로 증명해준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구일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암
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밝혀진 바는 없으나 고려 중기 승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아닐까 여겨지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때
윗도리가 몽땅 사라져 비석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
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오질 않을까 싶은데, 그
작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에 자리한 자연산 석굴(石窟)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서린 오래된 굴로 승가굴(僧伽窟)이
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
굴 중수비를 남기기도 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
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니 아마도 쾌유가 됐던 모양이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대
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를 올리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사의 주요 보물인 석조승가대사좌상이 홀로 봉안되어 있는데, 정작 약사전의 주
인인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없고, 승가대사상이 약사불의 자리와 직무를 대신하고 있다.

약사전의 주인인 승가대사(僧伽大師)는 인도의 승려로 당나라로 넘어가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
단했던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화신으로 널리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태가 그의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에 만들어진
확실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는 130cm이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중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
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으로 그의 표정을 보면 속세에서 상처받은 눈와 마음도 보기좋게 정화될 것만 같고
그 앞에 다가서면 '아이고 힘들지?'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 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蓮花臺, 근래에 만든 것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충북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에 있는 4사자3층석탑의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가
지고 있다.

대사상 뒤에 자리한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땅에 흔치 않은 오래된 승려상으로 약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
에서 일광욕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에 못지
않게 양호하여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한다. 조선 중기에 일어난 2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은 사라
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 보물
로 승진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보물 등급 외에는 아직 1,000까지
간 문화재 등급이 없는데 (국보가 300, 사적이 500, 서울 지방유형문화재가 300단위)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고려 초기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 보물 215호

▲  마애불로 올라가는 108계단의 위엄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약사전을 나와서 향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마음을 놀라게 만
든다. 그 계단은 절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꿀단지인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이 집채만한 바위에 둥지를 틀었다.

연화교(蓮花橋)란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까지 각
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다보면 멀리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가 떠오르듯 크
고 웅장하게 솟아오르고,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에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위엄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도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
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의 하
나지만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의 거리
를 두고 있고, 승가사의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지정
명칭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이었으나 지금은 마애여래좌상으로 무려
2글자나 줄였다. (정식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서울에서는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또는 비슷한) 연세가 높은 마애불(磨崖佛)이다.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승가사의 장대한 내력을
과시하는 산증인으로 승가대사상은 조성 관련 글씨라도 있지만 이 불상은 그것 마저 없어서 누
가 더 형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승가대사상이 1살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직각을 이루며 솟아난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피부
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거의 20년 만에 만난 그였지만 여전히 정정한데 반해 나는
10대 꼬마에서 30대의 한복판으로 적지 않게 늙어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조선 중기 전란 때 파괴된 것이 아닐까 싶지만 마애불에 적
당한 외상이나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없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거나 자연재해로 무너진 것
으로 보인다.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가 보호각의 흔적)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
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
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
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워넣어
앞으로 크게 노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 무
늬를 새겼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하
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우
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름
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화대(蓮花臺)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를 취했
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앙련(仰蓮)이 윗쪽에, 반대
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듯 싶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고려 초기의 대표적
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
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는 1980년
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불상 같다.

고려 초/중기에는 전국적으로 커다란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는 지방 세력의 일종
의 세력(勢力) 과시용으로 비슷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서울 지역 세력의 지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승가사가 고려 왕실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서린 절이라 제왕과 왕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
들을 투입하여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당시 서울은 남경(南京)이라 불리는 고려의 주요 도시
의 하나였고, 고려의 제왕들이 종종 순행을 했던 곳이다. (남경의 중심지는 서울 종로구의 경복
궁, 청와대 일대로 여겨짐)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고려 초기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일부러 드러누웠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히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고려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승가사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둥
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또한 바위 주변은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
으니 괜히 바위 꼭대기에 오르거나 불상을 만지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하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마애불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승가사 마무리

▲  12지신상이 새겨진 동쪽 옛길
(경내 바로 밑쪽)

▲  12지신상의 하나로 어디론가 터벅터벅
가고 있는 말

마애불을 20분 정도 둘러보고 대웅전과 산신각 주변에서 조금 머물다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
음을 기약하며 등을 돌렸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호국보탑으로 바로 내려가는 계단길 대신 동쪽 옛길로 갔다. 옛길은 조금 돌아가는
편이지만 예전에 승가사에 갈 때 꼭 거쳤던 길로 어차피 둘 다 호국보탑으로 이어진다.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제대로 묘사한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은 원래 호국보탑 부근에 있었다. 그러다가 호국보탑이 생기면서
옛길 중턱으로 터전을 옮겼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행복에 겨운 모습이
애를 여럿 둔 뚱보 엄마 같다.

▲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승가산림초소 주변

▲  승가산림초소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절을 둘러보고 나오니 배가 슬쩍 고프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은 김밥과 과자, 물을 모두 꺼내서
싹 섭취를 하고 올라올 때와 다르게 수레길로 내려왔다. 수레길은 4발 수레를 위해 닦은 길로
경사가 가파르고 울퉁불퉁해 오르기가 쉽지 않은 길인데, 중간에 승가사 셔틀차량이 노인들을
여럿 태우고 뒤뚱거리며 지나간다. 아무리 수레를 위한 길이라도 경사가 급하고 노면 상태가 고
르지 못해 운전도 꽤 쉽지가 않을 것이다.

수레길을 20분 정도 정신없이 내려가니 승가산림초소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잠시 소나무가 송림
(松林)을 이루는데, 그들이 아낌없이 불어주는 솔내음에 정신과 마음이 약간이나마 개운해진다.
산림초소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혜림정사란 조그만 절과 함께 빌라와 주택들이 시야를 가린다.
자연에서 아비규환의 속세로 완전히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빌라를 끼고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구기동계곡이 나오며, 계곡 끝에서 비봉길로 들어서면 구기터널3거리로 이어진다.

비록 찰라와 같은 짧은 코스였지만 엄연히 등산도 했고 시간도 18시가 넘었으니 근사하게 저녁
뒷풀이를 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서 먹을까 고심하다가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옛날민속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두부음식으로 유명한 식당으로 구기터널에서 신영3거리로 가
는 길목에 있다.


▲  옛날민속집에서 먹은 보리밥의 위엄

무엇을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오랜만에 보리밥을 먹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보리밥을 먹
은 지도 꽤 되었다. 그리고 잠깐이긴 하지만 산도 탔으니 동동주로 목을 시원하게 축여야 밥맛
이 더욱 날 것읻. 그래서 동동주도 1병 주문했다.

5분 정도 지나자 제일 먼저 동동주와 밑반찬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밑반찬이 예전보다 많
아졌네? 알고보니 오른쪽의 전과 김치, 하얀 묵 등 6가지는 원래 밑반찬이고, 왼쪽 5그릇은 보
리밥에 비벼먹을 나물로 콩나물과 당근, 생채, 상추 등 7가지에 이른다. 그래서 찬이 많아진 것
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저녁 식사의 주인공인 보리밥과 비지찌개가 등장한다. 보리밥은 커다란 양은 냄
비에 담겨져 있는데, 담긴 양은 냄비가 아까울 정도로 적다. 보리밥 외에 구수한 된장찌개와 콩
비지가 따라 나왔는데, 이들은 모두 보리밥용으로 보리밥에 딸려 나오는 나물과 찌개가 많으니
가격에 비해 본전 뽑기는 좋다. (단 고기는 없음)

보리밥에 나물 7가지와 콩비지, 된장찌개를 넣고 고추장으로 버무리니 어엿한 비빔밥이 되었고
적어보이던 밥도 그들이 더해져 양이 남부럽지 않게 늘었다. 거기에 누런 동동주까지 겯드리니
정말 제왕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열심히 먹고 보니 밥그릇은 맨바닥을 드러냈고, 나물과 반찬
도 겨우 일부분만 남았을 뿐이다.
식사가 끝나자 누룽지와 수정과가 후식으로 제공되었다. 누룽지는 맛이 구수했고, 수정과는 맛
이 달고 시원해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이렇게 기분 좋게 저녁을 마치고 신영3거리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9시 반, 여기서 길음역으
로 넘어가 후배들과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니 이리하여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나
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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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4/05/20 19:31 | 북한산 스폐셜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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