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와 조망이 일품인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칼바위...)

 

~~~ 볼거리가 풍부한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虎巖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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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  호암산 석구상

▲  호암산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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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흥동과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는 호암산(虎巖山, 385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자리한다. 호암산이란 이름은 산세가 호랑이를 닮았다
고 하여 유래된 것인데, 다음의 사연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394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 개성)을
버리고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겼다. 서울에 와서 주변 지형을 살피니 한강 남쪽에 호랑
이를 닮은 호암산과 활활 타오르는 불 모양의 관악산(冠岳山, 629m)이 사이 좋게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풍수지리(風水地理)적으로 서울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로
봤던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처럼 화살을 잘쏘며 무인(武人)으로써 크게
위엄을 날렸던 이성계, 허나 대자연이 빚은 호암산과 관악산의 패기에 그만 염통이 쫄깃
해지면서 서울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
산과 관악산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光化門)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매서운 기운을 누르고자 지은 호압사(虎壓寺)를 비롯하여 서울에
서 가장 크고 오래된 우물인 한우물, 비보풍수로 세워진 석구상, 신라 때 축성된 호암산
성터, 흔적만 아련히 남은 제2한우물터와 건물 유적, 호암산의 기운을 잠재우고자 기도를
올린 자리에 세워진 불영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삼성
산성지(三聖山聖地) 등, 신라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옛 흔적들이 서려있어 이곳
의 중요성을 새삼 가늠케 한다. 
게다가 조망 또한 천하일품이라 서울 대부분과 안양, 광명, 부천, 인천(仁川)은 물론 북
한산(삼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멋드러진 바위가 아
낌없이 포진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근래에는 호압사 남쪽에 넓게 소나무숲을
조성해 산림욕장을 닦았고, 벽산5단지 기점에는 비록 인공이긴 하지만 호암산폭포가 조성
되어 호암산의 새로운 명물을 꿈꾼다.

호암산은 호압사를 비롯해 벽산5단지, 신우초교, 삼성산성지, 서울대, 석수역, 시흥3동에
서 안길 수 있으며, 깃대봉과 장군봉을 거쳐 삼성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2011년
11월에는 사당역에서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호압사, 산림욕장, 호암산폭포, 시흥계곡
을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관악산둘레길(13km)이 뚫리면서 북한산둘레길에 감히 도전
장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남쪽 능선

호암산 정상 밑에 자리한 호압사에서 한우물이 있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는 소나무 산림욕장
을 거쳐가는 것과 호압사 뒤쪽에서 정상 입구를 거쳐 가는 길이 있다. 각 길마다 장단점이 있겠
지만 좀 쉽게 가고자 한다면 산림욕장 길이 좋다.

호압사 남쪽에 넓게 터를 닦은 소나무 산림욕장은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는 소나무 숲 사
이로 산책로가 실타래처럼 이어져 있고, 곳곳에 의자와 운동시설이 심어져 속인들의 편의를 제
공한다. 그리고 숲 남쪽에는 약수터가 있어 호암산이 베푸는 약수도 마실 수 있다. 그런데 1가
지 아쉬운 것은 약수터 주변을 흐르는 계곡을 자연 그대로 냅두지 않고 시멘트를 발라 둑과 물
길을 낸 것이다. 얼마나 보기가 흉하던지 애써 가꿔온 송림의 아름다움이 무색할 지경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2동 벽산아파트를 비롯하여 금천구와 광명시 지역이 눈 아래 펼쳐진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반면 호압사 뒤쪽은 시작부터 꽤나 각박하여 힘겨운 산길을 올라야 되지만 그 거리는 10분 내외
로 짧다. 잠깐의 고통을 딛고 길을 올라서면 금세 호암산 정상 입구에 도달한다. 여기서부터 남
쪽 봉우리까지는 아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
는 조망을 두 눈에 주어 담으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바로 호암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
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정상과 능선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
렇게 꿀 빠는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부드럽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래된 명소도 풍부하니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흐린 하늘 아래로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지역이 보인다.
호암산 능선에는 훤칠한 소나무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까지 다양한 모습의
소나무가 뿌리를 내려 호암산을 아름답고 푸르게 수식한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2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두툼하게 솟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

▲  솔내음이 춤을 추는 호암산 남쪽 능선길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과 호암산성터 주변

호압사와 정상에서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을 더듬으며 남쪽 봉우리에 이르면 한우물을 200m 가량
앞둔 지점에서 산길이 2개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바로 사방을 난간으로 두룬 돌로 쌓
은 기단(基壇)이 나오고, 그 안에 호암산의 상징물인 조그만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
엽게도 앉아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개의 상, 석구상으로 통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말들이 조금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는데,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
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南
七里, 시흥동)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
으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랑지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옆에서 바라본 석구상

▲  석구상 뒷부분의 위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석구상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해태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
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양과도 비슷해 보이
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하니,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
는 길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리와 비슷하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여겨진다. 그는 정
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든 이유도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
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등산객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거푸 터져 나오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은 웃음을 선사하며,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는 등 그의 인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  숲속 오솔길에 묻힌 호암산성터 - 사적 343호

석구상에서 바로 남쪽 능선길을 조금 가면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아련한 흔적을 만
날 수 있다. 흔적이라고 해봐야 성돌과 흙이 뒤섞인 1~2m 높이의 성터 윤곽이 전부로 이리저리
돌이 박혀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산길로 여기며 밟고 지나가기 일쑤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에 둘러진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산성의 길이
는 약 1.250m로 지금은 300m 정도만 간신히 살아있다. 성곽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축성 시기와 목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1990년 봄, 한우물과 호
암산성 일대를 발굴하면서 우물 2곳과 건물터 4곳이 드러났고, 6,5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토
기와 갖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유물과 관련 기록을 통해 신라 중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천구청 자료에 따르면 672년(문무왕 11년) 신라가 당나라의 공격을 막고자 세운 요새
로 여기고 있는데, 당시 신라는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와 힘겹게 줄다리기를 하던 상황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한우물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등의 흔적을 통해 산성이 그런
데로 구실을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로 이때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權
慄) 장군이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가 진을 치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선
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했다. 호암산
은 서울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점차 그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
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지금의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
리 소홀과 자연의 무정한 장난, 그리고 세월의 덧없는 무게까지 더해지면서 서서히 녹아내려갔
고, 등산객들의 속절없는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아무
리 인간이 멋드러지고 견고하게 건축물을 세워도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오르막을 타는 호암산성터

▲  호암산성 능선에서 바라본 매끄러운 곡선의 삼성산 줄기
삼성산 줄기 너머로 관악산 정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  호암산성 능선에서 만난 바위
바위 밑은 천길 낭떠러지이므로 주의 요망~

▲  제2한우물터 북쪽에 뿌리를 내린
옛 사람의 무덤


석구상에서 제2한우물터로 가는 길목에 조그만 무덤 1기가 뿌리를 내렸다. 삼성산이 있는 동쪽
을 바라보는 이 무덤은 대략 100여 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다른 무덤과 달리 산의 기맥이 이어
져 있지 않고 그냥 봉분(封墳)만 올린 조촐한 형태로 그 뒤쪽에는 바위가 누워있다.

무덤 앞에는 묘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없어 무덤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으며, 별다른 장식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보아 인근에 살던 백성의 무덤으로 보인다. 비석과 상석(床石) 대신
돌을 두툼하게 깔아 예를 올리는 공간을 마련했고, 봉분은 자연석으로 네모나게 호석(護石)까지
둘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가 서로 맞물린 듯 불규칙해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유적

호암산성터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부이다. 이곳에는 잡초가
무성한 드넓은 공간이 있는데, 서쪽에는 제2한우물터가, 동쪽에는 건물유적이 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수풀 속에 잠긴 건물유적에는 건물을 받쳤을 주춧돌과 건물터의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상실한 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나무에게 버림받은 낙엽들이 그 허
전한 빈터를 따스히 덮어주며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은 조선 때 호암산성을 관
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또는 군사들의 숙소나 창고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수풀 속에 묻혀 분간이 쉽지 않은 호암산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 맞은편에는 제2한우물터가 있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땅 속에 묻혀 강제로 기나
긴 잠을 자다가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우물의 길이는 남북이 18.5m, 동서 10m, 깊이 2m에 이르며
산꼭대기에 하나도 아닌 2개의 커다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은 실
감이 나지 않지만 옛날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하늘에
제를 지내거나 기우제 등 여러 의식이 거행된 곳처럼 마냥 신비롭게 보여 우물 가까이 다가서기
가 두려울 정도다. 괜히 저곳에 내려가다가 천벌을 받거나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 말
이다.

제2한우물터는 발굴 이후, 한우물처럼 온전히 재현되지 못하고 풀이 무성하도록 방치되고 있으
며, 석축과 우물을 구성하는데 쓰인 돌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호암산 산신(山神)도 모른다. 어차피 복원된 한우물이 있으니 제2한우물은
그냥 저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산 정상부에 둥지를 튼 거대한 옛 우물, 호암산 한우물
- 사적 343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에는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서 한우물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 정상부에 이런 거대한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천하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기며, 이곳에 물
을 대줄 마땅한 수원(水源)도 없다고 하는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오는 것인지 늘 물로 풍부
하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그 신비로움을 더욱 끌어올린다.

한우물은 천정, 용복, 용초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7~8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당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고 하며,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덧씌웠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할 때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햇빛을 보고자 앞을 다투어 쏟아
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한우물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
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사용하고, 가뭄이 극성일 때
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
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
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는 제2한우물터가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지만 현재는 그의 보호를 위해 식수로는 쓰지 않는다. 우물 남
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트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로 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의 건강을 위해 그 주위로 돌난간과 철제난간을 2중
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한우물이 있는 곳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천하를 굽어보기 좋은 곳이다. 속세가 한눈에 바라보
이는 벼랑에 한우물조망대가 터를 닦아놓아 이곳에 서면 금천구를 비롯한 서울의 서남부와 경기
도 광명시, 부천시 지역이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을 한다. 우물 주변에는 벤치가
여럿 설치되어있어 간식에 막걸리 1잔 걸치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유적을
한 덩어리로 묶어사적 343호로 승진되었다. (지정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시흥 벽산아파트와 시흥동과 독산동,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가까이에 벽산1/2단지와 호암산 서북쪽 줄기가 보이고, 그 산줄기 너머로
관악구와 영등포구, 동작구 지역은 물론 멀리 북한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사진 오른쪽 부분에는 호암산의 감시초소인 호압사가 바라보인다.


♠  한우물과 명품급 조망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 호암산 불영암(佛影庵)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가파른 벼랑 위에 터를 다지며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나 벽산아파트단
지,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으
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호랑이가 담배타령을 하던 조선 초기부터 조촐하게 기도처가 있었던 모양으로
호압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니 아마도 호압사 승려의 수행처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보통
100년 이상 묵은 절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당당하게 내걸지만 그런 것도 없는 것
으로 봐서는 1950년대 이후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
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
도 건물을 크게 짓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은 협소한 수준이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
어 물수급은 어렵지 않고,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
우물과 휼륭한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 절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예
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물
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오래된 볼거리를 추가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
'가 있어 눈길을 끈다.

불영암은 한우물의 이웃으로 그를 지켜주고 있으며, 조망은 천하 일품이라 절의 규모는 눈송이
같지만 뜨락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게다가 대웅전 옆에는 보기만 해도 정겨운 부뚜막을 설
치해 검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있는데, 인근에서 가져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땐다고 한다. 부
뚜막 옆에는 장작이 담을 이루고 있어, 심산유곡의 화전민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부뚜막이
장작을 먹어 모락모락 구름을 피어내면 나도 모르게 시장기가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또
한 국수와 부침개, 식혜, 커피 등을 파는데, 커피는 500원, 국수와 부침개는 3,000원선이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과 순찰중인 견공(犬公)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본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불
두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불두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은 들지만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 것
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있는데, 그 모습
이 마치 불상에 예를 올리는 듯 하다.


▲  불영암 돌탑거리

▲  제2한우물터 부근에서 수습된 절구통(절구석)의 일부와 모서리돌
불영암 주지승과 처사가 발견한 유물로 신라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영
암에 알렸다. 그래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 또는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아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옆에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호암산 북쪽 줄기, 그 중간에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  날카로운 모습의 바위이자 호암산의 또 다른 명물 ~ 칼바위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에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불영암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가
나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자리해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어 자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쿨하게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는 것보다
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속세를 향해 칼질을
벌일 것 같은 기세라 보기만 해도 염통이 긴장을 한다.

이런 바위에는 옛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다음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토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始興) 고을<당시 시흥(금천)의 중심지는 시흥동>까지 쳐들어
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때려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염통이 쫄깃해진 왜장은 장사
가 이기면 무조건 물러가겠다는 조건을 달며 칼바위에서 턱걸이 내기를 제안했다. 그래서 장사
와 왜군 대표 병사와 손에 땀을 쥐는 턱걸이 승부를 벌였는데, 왜군이 100번째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힘이 다해 바위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때 바위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내기에서 진 왜군은 분을 삼키며 철수를 하자 긴장이 풀린 장사는 소변을 보았는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하며, 그 바위가 인근에 있는 팽이바위라
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시절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
도 여럿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 통제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1) - 벽산5단지와 금천구, 광명시 지역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2) - 시흥동, 광명시 소하동, 구름산과
가학산 산줄기, 그리고 일몰

※ 호암산 찾아가기 (2013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단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
  단지(6515번만 해당)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 마을버스 01번 청색 차량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올라가는 코스
① 호압사 → 소나무 산림욕장 → 약수터에서 왼쪽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35분)
② 호압사 → 호암산 정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40~45분)
③ 벽산5단지 → 칼바위 → 한우물 → 석구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45분)
* 한우물에서 내려가는 경우
① 한우물 → 칼바위 → 벽산5단지 또는 시흥5동
② 한우물 → 제2한우물터 → 남서울약수 → 석수역
③ 한우물 → 호암1터널 → 관악산둘레길 경유(시흥계곡) → 석수역

* 호암산성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 83-1외
* 한우물과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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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2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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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3/12/13 22:02 | 서울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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