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의 떠오르는 성지 ~ 전북 군산 나들이 (왜식 사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교...)

 


♠ 근대 문화유산의 성지 ~ 전북 군산(群山) 나들이 ♠
군산 은적사
▲  군산 은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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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와 장마로 천하를 주름잡은 여름의 제국과 여름으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가을
이 팽팽히 맞서던 9월 하순에 인구 40만을 꿈꾸며 열심히 꿈틀거리는 서해안의 주요 항구
도시 군산을 찾았다.
집(도봉동)에서 온양온천역까지는 매우 저렴하지만 그만큼 굼벵이인 1호선 전철을 이용했
고(3시간 소요), 온양온천에서 군산까지는 값은 비싸지만 조금은 빠르고 안락한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했다.

장항선(長項線, 천안~장항) 직선화와 익산 연장으로 군산 도심에 자리한 군산역은 화물만
을 다루는 화물역으로 바뀌고, 금강하구둑 남쪽 시내 외곽에 새롭게 군산역을 세워 군산(
群山)을 찾은 손님들을 맞이한다.

군산역은 시내 변두리에 자리한 터라 역 건물 외에는 허허벌판이다. 역 앞에는 택시와 시
내버스 몇몇만이 졸고 있을 뿐, 열차의 기적소리가 무안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돈다. 30분
을 기다려 시내로 나가는 군산시내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동국사를 찾았다.


♠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왜식(倭式) 사찰이자 어둠의 시절
이 땅에 침투한 왜식 불교의 쓰라린 화석 - 동국사(東國寺)


▲  동국사 대웅전(大雄殿) - 등록문화재 64호

군산 도심인 금광동에는 특이한 모습의 절집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나라 유일의 왜식(倭式) 사
찰인 동국사이다. 이곳은 마치 왜열도의 오사까나 나라, 교토(京都)의 어느 절집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물씬 풍기게 하는데, 그럼 어찌하여 왜식 절집이 군산 한복판에 건방지게 박혀 있는 것
일까?

때는 19세기 후반, 왜국(倭國)은 호남평야(湖南平野)에 군침을 질질 흘리며 그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군산을 개항할 것을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요청했다. 그들의 징징거림에 마지못해 군산을
개방하자 왜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왜식 불교도 덩달아 들어와 절과 포교원을
세웠다. 동국사는 바로 그 시류를 타고 1909년 왜인 승려 내전불관(內田佛觀)이 왜인 일조통(一
條通)의 집을 빌려 만든 포교소에서 시작된다.
1913년 승려 우치다(內田)가 군산 왜인들의 지원을 받아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겨 금강선사(錦
江禪寺)라 이름 짓고 본당(本堂)과 고리(庫裡)를 만드니 그것이 지금의 동국사 대웅전이다. 이
절은 왜국 조동종(曹洞宗) 소속이었다.

왜열도에 불교가 들어간 것은 6세기 중엽으로 백제(百濟)의 중흥을 꿈꾸며 동분서주하던 성왕(
聖王, 523~554)이 속방(屬邦)인 왜열도를 교화시키고 백제와 왜의 일체를 견고히 하고자 불교를
보냈다. 많은 백제 승려와 건축공들이 왜로 건너가 불교를 전파하고, 백제의 주요 건축양식이던
하앙식(下昻式) 건물의 절을 많이 지었는데, 그것이 점차 왜국 건축양식의 중심이 되었다.
허나 세월이 흘러 19세기 이후 왜가 조선을 월등히 앞서게 되면서 상황은 뒤바뀌게 된다. 1876
년 군사력으로 어거지성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성사시킨 왜국은 유리한 입장에서 조선에
활발히 진출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왜국 불교까지 들어와 조선 불교를 위협하며, 왜식 사찰
까지 들어서게 된 것이다.

1913년 본당을 세운 이후, 1919년 범종과 범종각을 만들었고 1921년에 대문 돌기둥을 만들었다.
1932년 개축을 벌였으며, 1945년까지 왜인이 관리했으나, 해방 이후 그들의 땅으로 쫓겨나고 미
군정(美軍政)에 몰수되었다가 우리나라 정부에 넘어갔다.
1955년 전북종무원에서 매입하여 대웅전으로 삼았으며, 1970년 승려 남곡이 동국사로 이름을 갈
았다. 여기서 동국은 '해동대한민국(海東大韓民國)'의 약자로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에 이 절을
증여해 현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末寺)로 있다.

왜정(倭政) 때 지어진 왜식 절은 해방과 더불어 죄다 박살이 났으나 이곳만은 운이 좋게도 살아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우리나라 유일의 왜식 사찰이자 어둠의 시절을 상징하는 뼈아픈
역사의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 군산시에서는 군산시내에 흩어진 근대문화유산을 정
비하고 야무지게 홍보하면서 동국사는 군산 지역 근대문화유산의 성지(聖地)이자 군산에서 꼭
가봐야 되는 주요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혹자(或者)는 그런 것을 뭐하러 남기냐 반문하겠지만 엄연히 이 땅을 거쳐간 역사의 흔적이다.
무작정 밀어버릴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것은 보존하여 후대의 경계로 삼고 문화유산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동국사 하나 밀어버린다고 왜정 35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국사는 왜식 건물인 대웅전(요사 포함)과 범종각 그리고 근래에 지어진 1층 건물이 전부이다.
대웅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좌측으로 요사(寮舍)와 이어져 완전히 하나의 커다란 건물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한 건물 안에 대웅전과 요사가 모두 들어있는 셈이다.

대웅전 본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왜국 에도시대(江戶時代) 건
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우리나라 절집과 달리 단청(丹靑)이 없어 밋밋하고 소박한 느낌을 선사
하며, 건물 꼭대기의 용마루는 우리나라 건물과 달리 일직선을 이룬다. 건물의 거의 절반 이상
을 차지하고 있는 지붕은 그 높이가 상당하여 비례도 안맞아 보이고, 다소 육중해 보인다. 건물
의 아랫도리가 저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  요사로 쓰이는 대웅전의 좌측 부분

대웅전과 이어진 요사는 본전과 달리 지붕이 2겹으로 되어 있다. 본전과 요사 사이로 움푹 들어
간 부분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은 거의 '工' 구조이다.

▲  대웅전의 뒷부분

▲  대웅전의 좌측 요사의 뒷부분

▲  대웅전 본전과 요사를 잇는 복도

▲  대웅전 본전 내부


▲  왜식 건물의 방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종무소(宗務所)

▲  동국사 소조석가여래3존상 - 보물 1718호

대웅전 불단(佛壇)에는 동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석가3존불이 유리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나무로 틀을 짜고 진흙으로 빚어서 만든 소조불(塑造佛)로 원래는 김제 금산사 대장전(
大藏殿)에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이곳으로 넘어왔는데, 그 사유는 분명치가 않다.

1650년(효종 1년)에 조성된 조선 중기 불상으로 금동(金銅)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가섭존
자(迦葉尊者)와 아난존자(阿難尊者)가 협시(夾侍)해 있다. 보통은 관음보살(觀音普薩)이나 보현
보살(普賢菩薩) 등의 보살이 그를 협시하는데 반해 여기는 그의 제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
는 것이 특징이다.
환한 표정의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석가불은 통견의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으며,
그들 뒤로 고운 빛깔의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또한 그들 배에서 나온 복장(腹臟)유
물은 한지 다발과 사용하지 않은 한지(韓紙), 묵서 발원문, 묘법연화경과 보협인경 목판본 등의
전적(傳籍)류, 은제 후령통, 직물류, 곡식과 약초류 등 373점으로 불상 조성 당시의 상황을 밝
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들은 불상과 한 덩어리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리 유쾌하지 못한 시절에 지어진 왜식 절집, 그리고 거기서 만난 조선 중기 불상, 마치 우리
나라에서 빼돌린 불상을 봉안한 왜국에 어느 절집 같은 기분이다. 다행히도 우리 땅이라 망정이
지 실제 왜열도였다면 부아가 치밀어 유리를 박살냈을지도 모른다.

▲  대웅전 앞에 자리를 튼 귀여운 동자 모습의 보살상들 (지장보살로 여겨짐)

 ◀  왜식으로 지어진 조그만 범종각(梵鍾閣)
동국사 경내 맨우측에는 1919년에 지어진 범종
각이 있다. 네모난 석대(石臺)를 만들고 그 위
에 자리한 범종각에는 같은 시기에 왜국 교토에
서 조성된 쥐꼬리만한 범종이 걸려있다.
우리나라의 범종각과 달리 그 모습이 작고 범종
도 장난감만해 풍채가 좋은 우리나라 종과는 확
연한 차이를 보인다.


▲  범종각에 걸린 작은 범종

범종의 주요 부분인 유곽의 유두(乳頭)가 우리나라와 달리 25개나 된다. 종 피부에는 왜왕(倭王
)을 찬양하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종이 작아서 부처의 메세지가 속세에 제대로 울려퍼
질련지 모르겠다. 범종보다는 거의 장난감종이나 식사시간을 알릴 때 치는 종으로 더 적당해 보
인다.

▲  범종각을 둘러싼 조그만 보살상 36기

범종각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싼 석조보살상은 1917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모습이 정말로 제각각
이다. 왼쪽 사진의 보살은 마치 몸이라도 푸는 듯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이국
적인 그들의 모습에 눈길이 좀처럼 떼어질 줄을 모른다.

※ 동국사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행 고속버스가 15~20분 간격으로 떠나며, 동서울터
  미널에서 50~90분 간격, 남부터미널에서는 1일 3회 떠난다.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대천역에서 장항선 열차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천안, 대전(동부/유성), 청주, 전주, 익산, 광주, 대구(서부)
  , 부산(동부)에서 군산행 직행버스 이용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 앞, 터미널 남쪽 팔마광장에서 명산4거리(대학로) 경유 군산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명산4거리 하차, 버스는 자주 다닌다.
* 명산4거리에서 도보 2분. 이정표가 명산4거리와 절입구에 있어 찾기는 쉽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절 주변 골목에 주차 요망)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 → 대야교차로에서 21번 외곽국도로 우회전 → 군산대교차
   로에서 대학로로 우회전 → 명산4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바로 나오는 4거리에서 동국사길로 좌
   회전 → 동국사
② 서해안고속도로 → 군산나들목을 나와 군산 방면으로 직진 → 미원동4거리에서 우회전 → 명
   산4거리 직진하여 바로 나오는 4거리에서 동국사길로 좌회전 → 동국사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금광동 135-1 (☎ 063-462-5366)
* 동국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동국사 뒤쪽에 병풍처럼 둘러진 대나무밭
산바람이 불면서 대나무의 향연이 그윽히 울려 펴진다.


♠  군산시내에 자리한 아늑한 산사 ~ 설림산 은적사(雪琳山 隱寂寺)

▲  슬슬 가을을 준비하는 은적사 외곽의 나무들

군산시내 서남쪽에는 설림산(115.8m)이란 조그만 산이 누워있다. 그 산의 남쪽 자락에는 군산에
서 가장 큰 절인 은적사가 조용히 또아리를 틀어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보듬는다. 절의 이름
인 은적(隱寂)은 해탈을 위해 은거하며 수도에 정진한다는 뜻으로 지금은 시가지에 둘러싸여 은
적이란 이름이 조금은 무색해진 것 같다.

은적사는 613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나 그 당시 군산은 엄연한 백
제 땅으로 당시 백제를 다스리던 군주는 무왕(武王)이었다. 그 시절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는 정
말로 험악하기 그지 없었지. 상황이 그러한데 아무리 원광이 신라에 이름난 승려라 할지라도 적
국에 절을 세우는 건 어림도 없었을 것이며, 백제 또한 적국의 승려가 설치는 것을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원광국사의 창건설은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7세기 중반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하나 있다. 그 설에 의하면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해 백
제를 공격하던 660년 여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금강 하류인 설
림산 부근 천방산(千房山) 아래에 상륙했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하여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해
지자 산에 올라 안개를 치워주면 이 산에 천사(千寺)를 지어 바치겠다며 산신에게 기도를 올렸
다. 그랬더니만 감쪽같이 안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을 지을 자리를 물색했으나 워낙 지세가 협소하여 부득이 주춧돌 1,000개를 여러 곳에
놓고 1개의 절만 지어 천방사(千房寺)라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은적사의 전신(前身)이라는 것이
다. 허나 당나라군이 백제를 접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힘겹게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에 무슨
여력으로 절을 짓겠는가? 이 역시 가능성이 없다. 결론은 창건 시기는 모른다는 것.

어쨌든 창건 이후 952년(광종 3년)에 정진(靜眞)국사가 중건했고, 1373년(공민왕 22)에 나옹(奈
翁)대사가 중수했다고 한다. 그 이후 1781년에 보경(寶鏡)선사가 중수했으며, 1937년과 1947년
에 중수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절의 내력 가운데 그나마 조선 이후만 신뢰도가 높을 뿐, 그 이
전은 증거물이 전혀 없다.

▲  은적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구분짓은
문으로 문 밖은 소룡동 주택가이다.

▲  은적사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큰 건물로
2000년에 세워졌다.


▲  은적사 지장전(地藏殿)
명부전을 부시고 만든 2층 건물로 그 모습이
금산사 미륵전(彌勒殿)의 축소판 같다.


▲  은적사 천왕문(天王門)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일주문을
지나면 주차장과 함께 모습을 비춘다.


1980년까지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있다가 그 이후 조계종(曹溪宗)으로 전환했다. 1989년 삼
성각이 불타서 없어지고, 1991년 은적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지방문화재인 산신각(山神閣
)이 방화로 사라지는 불행을 겪었다. 1993년에는 명부전(冥府殿)을 부시고 그 자리에 2층의 지
장전을 세우는 한편 조선 중기에 지어졌다고 하는 대웅전을 해체하여 지금처럼 몸집을 늘렸다.
1994년 성우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계속 불사를 벌여 200평에 불과하던 경내가 무려 4,000평으로
확장되었다.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극락전, 범종각, 화엄회, 교육관 등 8~9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대부분 1980년대 이후 건물이라 고색의 흔적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
다 씻겨가 버렸다.
대웅전 뜨락에는 석가탑(釋迦塔)을 빼어닮은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가을 햇살을 즐긴다. 이곳
에는 예전에 선종암(善宗庵)에서 가져온 오래된 3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질 않는다. 설마 그 낡은 탑이 이 탑으로 둔갑된 것은 아니겠지? 선종암은 설림산 북
쪽에 있던 암자로 왜정 때 상수도 수원지 공사로 절이 파괴되면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장전 옆에는 교육관과 2층 규모의 어린이집이 있는데, 어린이집은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으며, 경내 뜨락에는 잔디가 곱게 깔려 깨끗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풍긴다. 일주문 옆에는 조
그만 찻집이 있어 잠시 발을 멈추고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도 누릴 수 있다.

▲  은적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 팽나무
나이가 약 260년으로 나무의 높이가 20m,
둘레가 2.5m에 이른다. 3m 지점에서
가지가 3개가 갈라져 장관을 이룬다.
군산시 보호수 9-2-21-2호

▲  대웅전 뜨락의 지장보살상(地藏菩薩)
왼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 대신
약사여래의 약합(藥盒) 같은 무엇인가가
조심스레 들려져 있다.


은적사에 있는 오래된 흔적으로는 나이 260년을 헤아린 거대한 팽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그
나마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조선 중기에 세워졌다는 대웅전은 1980년에 새로 지었으
니 고색의 기운은 애당초 말라버렸고, 그 대웅전에는 이곳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인 석가여래3존
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것도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닌 김제 금산사(金山寺) 인근 절에서 20
세기 초반 경에 가져온 것이다.
이 불상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夾侍)한 3존불로 1629년(인조
6년)에 조성된 것이다. 현재는 금동으로 도금을 했으며, 개금(改金)할 때 '다라니경' 등의 복장
물(腹臟物)이 나왔다고 하나 현재는 없다.


▲  은적사 대웅전(大雄殿)과 3층석탑
대웅전은 1980년에 중수한 것으로 원래 건물은 조선 중종 때 중창된 것이라 전한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3존불를 비롯하여 1991년에 불타버린
산신각에서 옮겨온 칠성탱(七星幀)과 산신탱(山神幀), 독성상(獨聖像) 등이
봉안되어 있다.

▲  은적사 석가여래3존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84호
조선 중기 불상으로 화려한 닫집과 고운 색깔의 후불탱화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찬란함의 극치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  대웅전 우측 부분의 불화들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상(獨聖像)

▲  대웅전 좌측 부분의 불화들
신중도(神衆圖)와 영산회상도


▲  대웅전 좌측 언덕에 지어진 거대한 석불입상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취하며 지그시 군산시내를 굽어본다.

군산시내에서 나름 오래된 터줏대감 사찰이지만 동국사에 크게 밀려 외지 관광객은 그리 없다.
관광 수요를 부를 만한 매력도 거의 없고, 보물도 빈약하니 그런 것이다. 게다가 주택가가 절
밑에까지 밀려와 은적이란 이름도 조금 무색하다. 허나 자리가 좋아 학의 품에 안긴 알처럼 포
근하고 아늑함이 밀려오는 도시 속에 조촐한 오아사스 같은 곳이다.
 
※ 은적사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에서 소룡4거리 경유 군산대, 비응도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은
  적사(1,2,4,5,7,8,85번)나 월명여중(3,7,50,60,80번 계열 시내버스)에서 내려 도보 10분. 소
  룡초교 뒤에 절이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에 주차장 있음)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 → 대야교차로에서 21번 외곽국도로 우회전 → 공항교차로
   에서 산북로로 우회전 → 소룡4거리 직진 → 은적사입구에서 설림3길로 우회전 → 은적사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소룡동 1332 (☎ 063-466-4526~8)


♠  왜정의 수탈과 착취의 쓰라린 흔적 ~
발산초등학교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군산시내에 있는 은적사와 동국사를 둘러보고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를 찾았다. 이
곳에는 발산리 석등과 5층석탑을 비롯하여 문화유산 30여 점이 깃들여 있어 군산의 조촐한 보물
창고이자 노천박물관 같은 곳이다.

이곳에 이토록 많은 문화유산이 서린 것은 학교 교장이나 선생이 수집하거나 옛 절터가 있어서
가 아니다. 바로 왜정 때 이곳에 대농장을 꾸리며 조선인을 착취한 어느 왜인 지주가 악착같이
수집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던 대한제국 시절, 호남평야(湖南平野)에 잔뜩 눈독을 들인 왜
국은 평야와 가까운 군산을 개항할 것을 대한제국에 요구했다. 개항이 이루어지자 많은 왜인들
이 군산에 몰려와 말뚝을 박았는데, 그중에 시마다니(嶋谷) 야소야(이후 시마다니)도 있었다.

시마다니는 야마구찌(山口)현 구카군 출신으로 주조업(酒造業)으로 어느 정도 돈을 주무르고 있
었다. 군산이 개항되자 호남평야에서 술의 원료인 쌀을 저렴하게 공급 받고자 군산으로 건너와
70,000원의 자금을 쏟아부어 임피면과 개정면 지역의 땅을 사들여 1903년 12월, 486정보의 농장
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의 발산초등학교에 대저택을 지었는데, 1910년 이후 전북과 전남, 충남
에서 적당한 문화유산을 빼돌려 저택의 정원을 채웠다. 또한 동산문화재에도 검은 마음을 품어
막대한 문화유산을 빼돌렸으며, 그것을 안심하게 보관하고자 3층 규모의 거대한 콘크리트 금고
를 만들었다.

군산 지역 농민을 가득 쥐어짜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마다니, 그러나 1945년 그들이 신으로 받
들던 왜왕이 미국에게 살려달라고 구차하게 꼬랑지를 내리면서 왜국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38도 이남을 장악한 미국은 조선에 거주하는 왜인들에게 1946년 봄까지 무조건 그들 나라로 꺼
질 것을 명했다. 또한 1인당 가지고 갈 수 있는 돈은 1,000엔으로 한정시켰다. 상황이 이러자
조선에서 떵떵거리고 살던 왜인들은 그야말로 쪽박을 차게 생겼다. 그동안 긁어모은 것이 얼만
데 고작 1,000엔이란 말인가? (왜열도에 살던 조선인은 귀국 희망자에 한해 1,000원까지 소지하
고 귀국할 수 있었음) 시마다니 역시 꼴통이 터질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여기서 벌어
들인 막대한 재산을 포기하고 가는 것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것이 한국에 귀화 요청, 귀화를 허락해달라며 미군정에 징징거렸으나 결국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방 2개만을 간신히 지닌 채 1946년 봄, 부산에서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꼬
랑지를 축내린 늙은 개처럼 통쾌히 추방되고 만다. 결국은 재산의 5%도 건지지 못한 채, 개쫓겨
나듯 돌아감 셈이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시마다니의 농장과 문화유산은 미군정이 모두 몰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넘겼다. 동산문화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으며, 그의 집은 때려부시고 1947년 그 자리에 발산초등학교를 세웠다.
허나 정원을 수식하던 문화유산은 태반이 고향을 알지 못해 돌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눌러앉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이들을 정성껏 보호하고 관리하여 보존상태가 좋으며 어린이들의
살아있는 역사, 문화유산 공부에도 크게 활용되고 있다.

왜정 때 왜인 농장에서 소작농(小作農)으로 일하던 농민들은 왜인 지주에서 생산량의 무려 50~
70%를 지세(地稅)로 뜯겨 늘 굶주림에 허덕였다. 쌀과 돈을 꾸더라도 그 이자가 엄청나 갚느라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  이곳에 말뚝을 박은 욕심꾸러기 왜인의 부질없는 욕심의 현장
개정면 구 일본인농장 창고(금고) - 등록문화재 182호

조촐하게 꾸며진 시골학교인 발산초등학교는 석조문화유산 말고도 관심을 끄는 건물이 하나 있
다. 바로 시마다니가 귀중품을 보관하던 3층짜리 창고가 그것이다. 다소 흉물스럽게 남아있는
이 건물은 밤에는 정말 귀신들이 나와 잔치를 벌일 정도로 음침해 보인다.

이 창고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3층 건물로 외벽은 그 당시 흔했던 벽돌 대신 콘크리트 몰탈의
거푸집 공법으로 만들어 내부의 각 층을 구분하는 나무 마루바닥을 만들었다. 그리고 외부로 난
창에는 쇠창살을 달고 철문으로 2중의 방범장치를 만들었다. 또한 출입문에는 커다란 미국제 금
고문을 달았다. 이렇게 무식하게 큰 금고까지 둘 정도면 시마다니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그렇게나 떵떵거리며 지역 주민들을 쥐어짜던 그는 1945년 왜국의 패망으로 애지중지하던 보물
과 재산을 챙기지도 못하고 거지꼴로 추방되었으니 결국 지나친 욕심이 그런 화를 부른 것이리
라. 그 이후 6.25 때는 군산을 점령한 북한군이 군산 지역 우익인사들을 이곳에 가두고 괴롭히
기도 했다.

시마다니는 통쾌하게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과 흔적은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악명 높은 이름은 이곳을 찾은 이들로부터 두고두고
회자되며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 자신의 이름 4자는 참 제대로 떨치고 간 셈이다. 이 금고와
발산초교, 이곳의 문화유산이 있는 이상은 그의 이름은 영원히 묻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초등학교 뒤쪽에 공원처럼 꾸며진 석조문화유산의 보금자리
시마다니 창고와 달리 잠시 발을 쉬고 싶은 아늑한 쉼터이다.


▲  어느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을 지켰을 양석(羊石)과 망주석(望柱石),
그리고 다양한 모습의 문인석(文人石)과 귀부(龜趺),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들

발산초등학교 뜨락을 가득 메운 저들의 고향은 대부분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시마다니가 마구잡
이로 빼돌리면서 자신의 고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자신이 어디서 왔는
지를 망각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며 처지가 비슷한 여러 석물과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 초등학
교의 뒤뜰을 가득 메운다. 적어도 어디서 가져왔는지 기록이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이
나라 잃은 문화유산의 얄미운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  사대부의 무덤에서 가져온 다양한 형태의 장명등(長明燈)들, 그들 사이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인 발산리 석등의 위엄이 단연 돋보인다.

▲  발산리 석등(鉢山里 石燈) - 보물 234호

발산초등학교의 문화유산 중 단연 으뜸은 발산리 석등이 아닐까 싶다. 신라 후기 혹은 고려 초
기에 조성된 아름다운 석등으로 건강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특히 기둥에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
상(飛上)하는 용이 진하게 새겨져 있는데,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구름 속을 헤엄치는 용을 보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형태의 석등은 오로지 이것이 유일하여 그만큼 가치가 상당한 보물
이다.
원래는 전주 부근인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鳳林寺)터에 있던 것을 시마다니의 눈에 찍혀
이곳에 끌려오게 된 것이다. 아무리 미술에 문외한이라 해도 저렇게 섬세하고 수려한 석등에 혹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석등을 받치는 바닥돌과 하대석(下臺石)은 같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동그
란 하대를 두었는데, 아래로 잎을 펼친 복련(伏蓮)이 8개로 새겨져 있다. 석등의 기둥인 간석(
竿石)은 원통형으로 아래서 위까지 용무늬가 실감나게 새겨져 있다. 화사석을 받치는 상대석(上
臺石)은 8각으로 8개의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등의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4각의 네 모서
리를 둥글게 다듬어서 8각을 이루게 했는데, 창 사이로 특이하게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지붕돌은 8각으로 모서리 선이 선명하며, 지붕돌의 위쪽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장식 받침대를 두었으나 보주(寶珠) 등의 머리장식은 없다.

화사석의 사천왕상이나 지붕돌의 양식 등은 보아 신라 후기 양식을 띄고 있지만 받침부분의 기
둥이 4각으로 변하고 화사석 역시 4각을 닮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8각에서 4각으로 변하는
중간단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석등의 조성 시기는 빠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초기로 여겨지며, 높이는 2.5m이다.


▲  발산리석등의 화사석(火舍石)
화사석 창 사이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보존상태는 그런데로
괜찮지만 저렇게 봐서는 어느 천왕인지는 쉽사리 구별이 가질 않는다.

◀  발산리석등의 기둥(간석)과 하대석

아래로 향해 늘어진 복련의 잎은 마치 고무신을
나란히 얹어놓은 듯 하다. 기둥에는 거대한 용
이 기둥을 휘감으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섬세
하게 표현되었다

▲  맵시가 일품인 발산리5층석탑 - 보물 276호

발산초등학교의 석조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키가 큰 발산리5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탑
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이다. 원래는 앞의 석등과 더불어 봉림사터에 있던 것
을 석등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왔다. 5층석탑이긴 하지만 5층 부분은 없어지고 지금은 4층만 남
아 있으며, 탑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후에 만든 것이다. 탑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고 맵시가
고우며, 고려 탑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  6각부도(왼쪽)와 2층과 3층 탑신을 상실한 3층석탑(가운데)
그리고 키 작은 부도(오른쪽)

◀ 발산리6각부도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85호
흡사 삿갓을 쓴 나그네같은 이 6각부도는 시마
다니가 소재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가져온 것
이다.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
도는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6각형 부도로 균형
잡힌 몸매에 조각 수법도 대단하다. 우리나라에
6각형 불교 조형물이 등장한 것은 고려 중기로
송나라의 6각형 석물을 보고 따라한 것이 그 시
초이다.

바닥돌 위에 6각의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6각
의 중대석을 두었다. 6각의 탑신에는 2개의 문
비를 새겼으며, 탑신 지붕에는 기와를 선명하게
조각했다. 탑의 높이는 1.7m로 작고 단촐하지만
고려 부도(浮屠)의 아름다움이 깃들여진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 발산초등학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군산시외/고속터미널 남쪽 팔마광장5거리 농협앞에서 개정, 대야 방면 21, 22, 23, 30번 계열
  시내버스를 타고 발산육교에서 하차, 여기서 건너편으로 길을 건너 개정면사무소 방면으로 7
  분 정도 걸으면 발산초교이다. (이정표가 있으므로 찾기는 쉬움)
* 군산역에서 발산초교까지는 7km 거리로 가까우나 바로 가는 시내버스가 없다. 버스로 갈 경우
  시내로 나가는 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군산시청이나 시외터미널에서 개정, 발산 방면 시내버
  스로 환승해야 된다. 허나 군산역에서 택시로 가면 10분 이내에 도착한다.
* 익산역이나 익산터미널, 원광대병원에서 20번 시내버스를 타고 대야4거리에서 21, 22, 23, 30
  번 계열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발산 하차 / 대야에서 86, 87번 버스를 탔을 경우에는 발산초교
  (개정면사무소)에서 내린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개정면사무소나 학교 주변에 하면 됨)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을 나와서 대야 방면으로 우회전 → 대야 → 발산초교 입구
   에서 우회전 → 발산초교
* 발산초등학교는 늘 개방되어 있다. (개방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 8~9시까지)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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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2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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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2/12/11 18:19 | 전북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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