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호수, 도자기축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 ~ 이천 설봉산 (설봉공원, 3형제바위, 영월암)

 


' 이천 설봉산 나들이 (설봉공원, 3형제바위, 영월암) '
설봉산 삼형제바위에서 굽어본 이천시내
▲  설봉산 삼형제바위에서 바라본 이천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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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을 얼마 앞둔 5월 초에 쌀과 도자기의 고장인 경기도 이천 고을을 찾
았다. 이천에 간 것은 이천의 명산(名山)이자 듬직한 뒷산인 설봉산을 보고자 함인데 이천은
서울과도 가까운 곳임에도 지지리도 인연이 없는 고장이라 발을 들인 횟수는 정말 한손에 꼽
을 정도이다.

이천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관고리 석불로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이다.
광주(廣州)에서 광주좌석버스 114번을 타고 설봉산과 가까운 이천의료원(소방서) 정류장에서
내리니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게 왠 떡인가!' 싶어 흥분하는
마음을 다독이며 이정표의 지시를 따라 산 쪽으로 들어가니 대각사(大覺寺)란 조그만 절집이
모습을 비춘다. 이 절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선방으로 쓰이는 건물 2채가 전부로 대웅전을 지
나면 흙길이 야트막한 경사로 펼쳐지는데, 그 길의 끝에 관고리석불입상이 있다.


♠  귀와 손이 유난히도 큰 고려시대 석불 ~
관고리 석불입상(官庫里 石佛立像) - 이천시 향토유적 6호

대각사(옛 법왕정사) 뒤쪽 언덕에 고색이 때로 가득한 관고리석불입상이 자리해 있다. 고려 중
기 이후에 세워진 불상으로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대각사의 든든한 밥줄이다. 원래는 미륵골
이라 불리던 산골 밭에 있던 것을 1987년 12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문화재 안내문에
는 석불입상이 아닌 입상석불로 나와있음>


이 석불은 높이가 4m로 머리칼은 나발(螺髮)이며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
굴은 밤하늘에 비치는 보름달처럼 동그란 모습으로 볼에는 살이 적당하게 붙어 있다. 무지개처
럼 구부러진 눈썹에 두 눈은 지그시 감겨져 있으며, 코는 세모 모양으로 오뚝하다. 다물어진 입
술에는 은은히 미소가 풍겨져 나와 중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귀는 얼굴보다 길어서 양쪽
어깨에 닿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석불이 걸치고 있는 법의(法衣)는 通肩(통견)으로 가슴부터 옷무늬가 거의 'u'자형으로 살짝 구
부러지다가 무릎에서 타원형을 이루어 발 밑까지 닿아있다. 오른손은 옆으로 곧게 내리고 왼손
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배 앞에서 구부렸는데, 몸에 비해 손이 좀 큰 편이다. 콧마루와 손가락
부위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 시멘트로 땜질하였고, 등 복판에는 10cm가량의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데, 머리 뒤에 씌우는 두광(頭光)을 만들기 위한 자리로 여겨진다.

석불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 그가 있던 골짜기가 미륵골이란 점을 보면 오랫동안 지
역 주민들로부터 미륵불(彌勒佛)로 숭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
진다.  또한 석불 주변에서 돌덩어리와 기와조각이 나온 적이 있어 불상을 모신 건물이나 조그
만 절이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 관고리 석불입상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산39-3

관고리석불입상을 둘러보고 다시 큰길로 나와 설
봉공원으로 이동했다. 은빛물결이 일렁이는 설봉
저수지(관고저수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설봉공원
을 벗어나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을 지나면 영월암
으로 가는 조그만 숲길과 계곡이 그림처럼 나타
난다. 이 골짜기를 범앙골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호랑이가 살던 곳이라 하며, 영월암 승려가 출타
하여 늦게 귀가하면 그가 걱정이 되었는지 범앙
골 호랑이가 종종 마중을 나갔다는 재미난 전설
도 1토막 전해온다.
영월암 가는 길은 사람과 수레들로 부산한 설봉
저수지와 달리 인적이 없어 고요함과 녹음이 가
득 깃들여진 것이 속세에 찌든 마음을 무척 시원
하게 해준다.

▲  석불의 측면
오른손에 마치 야구글러브를 낀 듯
손의 크기가 상식 밖으로 너무 크다.


♠  이천 도자기축제의 현장, 설봉저수지(설봉호)와 설봉공원(雪峯公園)

▲ 설봉저수지(설봉호) - 수면 위로 도자기 모양의 분수대가 이채롭다.▼

드넓게 펼쳐진 설봉저수지(관고저수지)는 이천의 손꼽히는 관광지로 1969년 관개수로 및 관광개
발을 목적으로 1970년 7월에 준공되었다. (총 공사비는 2,800만원) 낚시터로도 명성이 자자하여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찾아오며 저수지 주변으로 설봉공원이 조성되어 이천의 주요 밥벌이인
이천도자기축제(4~5월)와 이천쌀문화축제(가을), 세계도자비엔날레가 절찬리에 열린다. 호수 주
변으로 순환도로가 놓여져 아름다운 산책코스를 뽐내며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그만이다.


▲  설봉저수지 둑방에 '새계도자기엑스포 주행사장'이 쓰여 있다.
설봉저수지를 옆에 낀 설봉공원은 2001년 세계도자기엑스포가 열린 현장으로
매년 4~5월에 이천도자기 축제가 열린다. 축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설봉호의 은빛물결 너머로 바라본 설봉공원과 설봉산 줄기

▲  봄도 한없이 머물다 가는 설봉저수지 산책로
저수지 주변으로 운치가 서린 산책로가 둘러져 있다. 산책로 곳곳으로
조각품을 아낌없이 배치하여 밋밋한 공간을 채워준다.


▲  월전미술관 부근에서 만난 어느 심오한 작품

멀뚱한 표정의 사람 조형이 큰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마치 갖은 욕심과 속세의 짐 등을 싫든
좋든 머리와 마음 속에 이고 사는 우리네 가련한 인간을 상징하는 것 같다. 번뇌로 상징되는 저
돌을 과감히 내던지는 순간 마음도 편해지고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도 이를 수 있을지
도 모른다. 허나 해탈을 한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단계에 가면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모를 또 다른 걱정꺼리가 존재할 것이다.


▲  이천 고을을 빛낸 이들의 조각상과 고을에 얽힌 충효 이야기를
한데 정리한 충효(忠孝)동산

▲  충효동산 정문인 충효문(忠孝門)

◀  충효동산 한복판에 듬직하게 자리한 복천
서희(福川 徐熙) 동상의 위엄
서희는 993년 고려와 거란과의 1차전쟁을 승리
로 이끌며 거란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통해 청천강 서부에 강동6주(江東六州) 280리
땅을 얻은 고려의 대영웅이자 이천의 자랑이다.


▲  설봉서원(雪峯書院) - 이천시 향토유적 18호

월전미술관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길 오른쪽으로 태극마크의 홍살문을 갖춘 설봉서원이 나온
다. 이곳은 1564년 이천부사(利川府使) 정현(鄭玄)이 안흥지 주변에 세운 안흥정사(安興精舍)에
서 시작되었다.
159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설봉서원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
원철폐령으로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1990년 이천시와 유림의 노력으로 서원복원이 추진되었
으며, 2005년에 드디어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7년 4월에 복원되었다. 비록 고색의 내음은 증발
해버렸지만 서희를 비롯하여 김안국(金安國), 최숙정(崔淑精), 이관의(李寬義) 등을 배향(配享)
하고 있으며, 지역 학생들과 일반인을 위해 한문학과 전통예절, 국악 교실을 개설하여 호응이
좋다고 한다. 교육은 무료 (문의 ☎ 031-632-6564)


♠  설봉산(雪峯山, 394m)의 명물, 3형제바위

▲  3형제바위 입구

산내음을 만끽하며 숲길을 10분 가량 오르면 3형제바위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바위 쪽으로 가
나 수레길로 가나 영월암은 나오지만 기왕 산에 온 거 콘크리트 수레길보다는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이 더 호젓하지 않을까? 여기서 절까지는 두 길 모두 10~15분 정도 걸린다.


▲  마치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것 같은 3형제바위 산책로
산길 왼쪽에 엉뚱하게도 석탑의 부재(部材)로 여겨지는 납작한 돌이 박혀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영월암이나 인근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  어머니를 향한 3형제의 애듯한 전설이 서린 3형제바위

3형제바위 입구에서 산길로 3분 가량 들어가면 하늘로 솟은 3개의 바위가 교묘하게 붙어있는 3
형제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의 1/3지점에 가로로 가로로 틈이 그어져 정말 사람과 비슷한 모
습이다. 위대한 자연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어놓은 대작품으로 기가막힌 풍경에 사죽을 못쓰
는 옛 사람들은 그 바위에 단단히 반한 나머지 그럴싸한 전설을 만들어 우리에게 들려준다. 세
개의 바위가 서로 붙어 나란히 한 모습에 다정한 형제로 연상된 모양이다. 만약 바위가 2개였다
면 금슬이 좋은 부부바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늙은 어머니를 모신 나
무꾼 3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우애와 효성이 지
극하여 효자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어느날 설봉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던 형제가 날
이 저물도록 오지 않자 걱정이 된 어머니는 아
들을 찾아 산으로 나섰다. 뒤늦게 나무를 잔뜩
지고 귀가한 형제는 어머니가 없자 서둘러 어머
니를 찾으러 나섰다. 어디선가 호랭이의 울음소
리가 들려 달려가보니 낭떠러지 밑에서 어머니
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다급한 광
경을 본 형제는 어머니를 구하러 아래로 뛰어내
렸는데 그 순간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전설로는 어머니를 모시던 형제는 징병
(徵兵)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무사귀환을
애타게 빌었으나 약속한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홀로 생계를 꾸려가다가 그리움이 병이 되
어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뒤늦게 돌아온 3형제는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 엎드려 통곡하며
일어날 줄 몰랐고 그 모습이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  3형제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이천시내와 설봉저수지)


▲  드디어 녹음에 묻힌 영월암에 이르다.


♠  이천의 진산(鎭山) 설봉산에 포근히 안긴 오랜 산사
설봉산 영월암(映月庵) - 이천시 향토유적 14호


▲  영월암 경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요사채로 쓰이는 안심당)

달이 비춘다는 뜻의 영월암은 설봉산 깊숙한 산골에 안긴 산중암자이다. 이천 고을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7세기 중반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전혀 없다. 다
만 경내에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광배와 연화대좌, 3층석탑, 거대한 마애불 등이
있어 절이 한참 우후죽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이렇다할 내력을 남기지 못하다가 18세기에 들어서 1774년(영조 50년) 영월
낭규대사(映月 郎奎大師)가 중창을 벌였다. 1760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절의 이름
이 북악사(北岳寺)로 나와있는데, 낭규대사로 인해 지금의 이름으로 갈린 듯 하다.
 
1911년에 보은(普恩)이 중건하고, 1920년에는 극락전(極樂殿)을 옮겨 세웠으며, 1937년에 산신
각과 단하각을 손질하였다. 1949년에 이천향교 명륜당(明倫堂) 앞에 있던 풍영루(風詠樓)를 해
체하여 그 목재로 대웅전을 짓다가 그만 6.25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된 것을 전쟁이 끝난 1953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1989년 불의의 화재로 삼성각과 서요사채가 무너져 내린 것을 1991년 복원
하여 지금에 이른다.

절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요사 등 6~7동이 있으며, 고색의
내음은 다들 시들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하여 석조광배와
연화대좌, 3층석탑, 600년 묵은 오랜 은행나무 등이 있어 절의 유구한 내력을 가늠케 하며 1988
년 7월 27일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이천 시내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고, 달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삼한 산자락에 둥지를 튼 산
사로 속세의 번뇌를 설봉저수지에 던져놓고 무작정 안기고 싶은 정겨운 절집이다.

※ 영월암 찾아가기 (2012년 10월 기준)
* 서울강남고속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이천행 고속/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수원, 성남(야탑), 강릉, 구미, 대구(북부)에서 이천행 직행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과 3호선 양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500-2
  번 좌석버스 / 2,8호선 잠실역 중앙차로 정류장 500-1번 좌석버스 / 2호선 강변역(1번 출구),
  5호선 천호역(6번 출구)에서 1113-1번 좌석버스 / 8호선,분당선 모란역(5번 출구)에서 500-1,
  500-2번 좌석버스 이용 → 광주시내(보건소, 터미널)나 초월읍사무소, 곤지암터미널에서 114
  번 좌석버스로 환승하여 이천의료원(소방서)에서 하차 → 정류장 남쪽(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5분 정도 가면 설봉공원 입구이다. 여기서 영월암까지 도보 35~40분
* 이천시외고속터미널 북쪽 건너편 정류장에서 28번 시내버스를 타고 설봉공원 하차, 허나 버스
  가 자주 안다니므로 택시를 타거나 30분 정도 걸으면 설봉공원이다. 공원을 지나 영월암까지
  도보 25~3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절 직전에 주차장 있음)
① 중부고속도로 → 서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사음동3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이천시내로
   직진 → 이천의료원을 지나 설봉공원 입구에서 우회전 → 설봉공원 → 월전미술관 → 영월암
② 영동고속도로 → 이천나들목을 나와서 이천시내 방면으로 우회전 → 이천육교에서 설봉공원
   으로 좌회전 → 설봉공원 → 월전미술관 → 영월암

★ 영월암 관람정보
* 영월암에서 설봉산성을 거쳐 설봉산 정상까지 오르는데 1시간 남짓 걸린다.
*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38 (☎ 031-635-3457)

▲  중생 구제를 향한 부처의 은은한 메세지가
담겨진 범종각(梵鐘閣)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연등으로 주변을 두룬 영월암 대웅전(大雄殿)

영월암은 코앞에 다가온 초파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웅전 앞에 아기부처를 두어 관정의식
의 장을 만들고 연등으로 경내를 곱게 치장하였다. 하늘을 가리며 뜨락 허공에 걸쳐진 검은 덮
개로 햇빛이 들어오지 못해 경내는 시원하다.

경내를 발을 들이면 정면으로 법당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남향(南向)을 취하고 있는데, 1949년 이천향교 명륜당 앞의 풍영루를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지
은 것이다. 건물을 짓던 중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터지는 바람에 서둘러 피난짐을 꾸리느라
공사는 중단되었으며, 전쟁이 끝나고 1953년 11월에 가까스로 준공을 본 우여곡절이 많은 블전
이다. 불단(佛壇)에는 석가불을 비롯한 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앞에 차려진 관정(灌頂)의식의 현장

▲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를 나온 아기부처의 희열(喜悅)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는 하얀 코끼리 등 위에 놓여진 연꽃대좌에 아기부처가 오른손을 치켜들며
서 있다. 곧있으면 중생들의 하례와 관정의식을 받으며 시원하게 이른 피서를 즐길 생각인지 그
의 표정이 해맑아 보인다. 다양한 꽃으로 코끼리 주변을 아리땁게 치장하며 두 눈이 단단히 호
강을 하다못해 쾌재를 부른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아미타전(阿彌陀殿)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을 모신 건물로 1920년에 지어진 것이다.
근래 손질을 해서 그런지 매우 깨끗한 모습이다.

▲  대웅전에서 마애여래입상 가는 길목에 자리한 석불좌상과 3층석탑

▲  석조광배와 연화대좌를 갖춘 패기 돋는 석불좌상
(석불좌상의 석조광배와 연화대좌는 이천시 향토유적 3호)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올라가는 길목에 석불좌상과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우측에 자리한 석불
좌상의 석조광배(石造光背)와 연화대좌(蓮花臺座)를 보면 당당한 패기의 석불과 달리 고색의 때
가 만연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영월암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고려 때 혹은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영월암의 역
사가 꽤 깊음을 가늠하게 해준다. 광배의 높이는 156cm, 폭은 118cm, 두께가 45cm이며, 연화대
좌의 높이는 107cm에 이른다. 불상은 오래 전에 없어진 채, 땅에 엎어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불
상을 조성하면서 복원한 것이다.

▲  석불좌상의 뒷부분
기둥 모양의 길다란 돌이 연화대좌와 광배를
받치고 있다.

▲  석불좌상과 나란히 자리한 3층석탑
자신이 언제 태어나고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전혀 없는 가련한 탑이다.


불상이 편안히 기대고 선 광배는 하나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표면에 두 줄의 선으로 신광
(身光)과 두광(頭光)을 나타내었다. 연꽃잎과 불꽃무늬, 당초(唐草)무늬 등이 광배를 가득 수놓
고 있으나 유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 깎이고 깎여 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두광과 신광
이 접히는 곳과 두광 위쪽 가운데에 3존의 화불좌상(化佛坐像)을 새겼다.

불상의 보금자리인 연화대좌는 바닥돌과 기단석(基壇石), 상/중/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중대석
은 8각형으로 바닥돌은 네모난 모양이며, 하대석에는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상대석
에는 꽃잎이 하늘로 향한 앙련(仰蓮)을 새겼다. 꽃잎이 너무 아름다워 채색만 제대로 해주면 정
말 한 송이의 어여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석불좌상 좌측에 뿌리를 내린 3층석탑은 은행나무 밑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91년에 없어진 부
분을 보충하여 복원한 것이다.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있어야 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곳에 두지
를 않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원래 절에 있던 탑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 은행나무 밑에
수습한 것을 복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탑의 조성시기와 원래 위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의 탑이다. (3형제바위 입구에 있는 석탑 부재가 혹 이 탑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음)

마애여래입상과 약간 거리를 두고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우리에게 친숙한 칠성(七星)과 산신
(山神),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1989년 불의의 화재로 무너져 내린 것을 1991년에 다시 지
은 것이다. 산신과 칠성은 탱화(幀畵)로 그려져 있지만 독성은 유별나게 불전 뒤쪽 바위를 파내
어 적당한 공간을 만들고 그 자리에 독성상을 봉안했으며, 건물에 유리창을 설치하여 안에서도
친견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  그림의 여백처럼 허전해 보이는 삼성각 우측 부분
가건물과 비닐하우스, 장독대 등이 넓은 터를 듬성듬성 채운다.


♠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불상,
영월암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822호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영월암 경내 뒤쪽 커다란 바위에는 장대한 규모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이 이천시내를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내가 이곳까지 발을 들인 것도 바로 그를 보기 위함이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대체로 덩치가 크며, 비슷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각각 독특한 모습을 지니
고 있으며, 다소 작품성이 떨어지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곳의 마애불 역시 그런 요소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고려 불상으로 높이가 9m, 폭이 3m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의 불상이다. 그의 앞에
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주눅이 일고도 남을 것이다.


▲  마애불의 위쪽 부분

불상은 대체로 선으로 표현된 선각(線刻)이며 얼굴과 손은 얕음새김으로 표현되었다. 머리는 바
위 꼭대기에 있어 자세한 모습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얼굴은 둥근 형태로 나이가 지긋하고 온후
한 승려의 얼굴 같으며, 눈은 지그시 감고 있다. 세모로 우뚝 선 코는 큰 편이며, 앙 다물어진
두터운 입술에는 약간의 미소가 아련히 떠 있다. 귀는 길쭉하여 목까지 닿으며 볼과 턱에는 살
이 두툼하다.
두꺼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가 획 그러져 있으며, 덩치에 걸맞게 커다란 양 손은 가슴에 모았는
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드러내어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듯 하다.


▲  희미하게 비치는 옷주름이 전부인 마애불의 아랫 부분

불상의 몸을 뒤덮고 있는 옷은 발 아래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옷 주름은 소박하다. 위쪽의 주름
선은 확인이 쉽지만, 아랫쪽의 주름선은 마멸이 심해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확인이 가능하다. 온
화하고 덕망이 높은 승려의 분위기로 아마도 영월암과 인연이 깊은 어느 고승을 모델로 하여 만
든 듯 싶으며, 일부에서는 승려의 모습을 새긴 조사상(祖師像)으로 보기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후기 고승인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부모를 천도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니, 아마도 부모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이천 지역 지방세력이나 부호(富戶)의 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극한 나이를 먹었음에도 마애불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작품성은 그리 괜찮은 편은 아
니지만, 고려 마애불의 특징을 잘 간직한 불상으로 그 가치는 높다. 마애불 앞에 이르면 조촐한
영월암 경내가 훤히 바라보이며, 지나가는 봄도 마애불의 후덕한 모습에 단단히 매료되었는지
주변을 곱게 손질하였다. 녹음이 깃들여진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마애불이 그대들을 맞이할 것
이다.

▲  우측에서 바라본 마애불

▲  좌측에서 바라본 마애불

▲  녹음이 가득 깃들여진 영월암 은행나무 (경기-이천-1호)

경내로 들어서기 직전에 정겨운 풍경을 자아내는 고즈넉한 돌담길이 있다. 돌담길의 우측 끝부
분에 아름다운 여인네와 같은 커다란 은행나무 1그루가 한참 봄의 절정을 누린다.
은행나무는 자연으로 자라는 것이 아닌 사람이 심은 것이 대부분으로 이 나무 역시 영월암과 관
련된 승려가 어떤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나옹화상이
심었다고 하나 나무에게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아니면 내가 나무의 언어를 구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소상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지만 그러지를 못하니 진실을 알 도
리는 없다.
나무의 나이는 무려 640년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게 맞으면 나옹이 심었다는 전설도 어쩌면 들
어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의 높이는 마애불의 4배인 무려 37m에 이르며 세월을 꾸역꾸역
잡수신 탓에 둘레가 5m에 이른다.

초파일을 하루 앞둔 영월암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시간은 어언 18시를 가리킨다. 절에서는 저녁
공양(供養)을 보통 18시부터 하는데, 대웅전을 한참 사진에 넣고 있으려니 아줌마 신도가 저녁
시간이라며 밥 먹고 가라고 그런다. 절밥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 그들의 손길
을 따라 영월암 승려의 생활공간인 안심당(安心堂)으로 들어선다. 겉으론 대웅전처럼 작아보이
던 안심당 내부로 들어서니 서쪽으로 내부를 튼 탓에 무척 넓어 보였다. 공양간은 안심당의 서
쪽 칸으로 승려와 아줌마 신도들, 절을 찾은 이들이 한참 즐거운 공양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  영월암에서 먹은 저녁 공양의 위엄

공양은 뷔페식으로 반찬은 거의 10가지가 넘는다. 고기를 기피하는 절의 특성상 고기와 생선은
일체 없고 모두 나물이다. 국은 아욱국 비슷한 것이 제공되었다.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그릇이
깨질 정도로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아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역시나 먹는 시간만큼 흐뭇한 것은
없다. 절에서 정성스럽게 다듬은 반찬은 밥도둑이 따로 없어 금세 밥그릇을 비우고, 점심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해 불만에 가득찬 목구멍과 뱃속도 너무 흥겨워 한다.


▲  영월암을 나오면서 만난 조그만 승탑

저녁 공양을 마치고 아쉽지만 영월암과의 짧은
인연을 마감하고 다시 속세로 발길을 돌린다.
절로 오를 때는 3형제바위가 있는 산길로 갔지
만 속세로 내려갈 때는 수레길로 갔다. 내려가
는 도중에 왼쪽 언덕으로 조그만 승탑<僧塔, 부
도>이 눈에 띈다. 이 탑은 근래에 세운 것으로
머리 부분은 8각으로 되어있다.
조그만 앵두를 보듯 귀엽고 산듯해 보이는 그와
작별을 고하며 이천 설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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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2/10/18 14:09 | 수도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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