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파일 절 나들이 ~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서울 흥천사

 

' 4월 초파일 절 나들이 ~ 서울 흥천사(興天寺) '
흥천사 괘불
▲  흥천사 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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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변함없이 찾아온 불교(佛敎)의 경축일, 4월 초파일(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서울 돈암
동에 자리한 흥천사를 찾았다. 초파일 전날에는 중앙선 전철을 타고 미답지였던 양평 용문산(
龍門山)의 사나사(舍那寺)를 찾았고, 초파일 당일에는 딱히 정처(定處)를 두지 못해 방황하다
가 20년 전에 가봤던 흥천사에 시선이 멈추면서 그곳으로 길을 정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의 어지간한 고찰들은 죄다 발자국을 남긴 터라 벽지에 깊숙히 박힌 몇몇 절집과 비록 역사는
깊어도 고색(古色)의 흔적이 거의 없는 절 외에는 새롭게 갈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으로 나가도 되긴 하지만 초파일 만큼은 멀리 나가지 않고 가까운 곳을 찾아 편안하고 느
긋하게 초파일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

돈암동 뒷산에 있는 흥천사는 우리집(도봉동)에서 가깝다. 도봉동에서 돈암동까지 7개의 시내
버스 노선이 거의 새벽 1시까지 물 흐르듯 다녀 교통은 상당히 좋다.흥천사에 가기 전에 아는
분들이 성북동에 온다고 연통이 와서 잠시 그들과 최순우(崔淳雨) 옛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오후 2시에 길상사(吉詳寺)로 가려는 그들과 작별을 고하며 흥천사로 길을 재촉했다.

성북동과 흥천사는 제법 가까운 거리로 처음에는 돈암동 북쪽 산자락에 둥지를 튼 한신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려고 했다. 그게 조금은 빠르기 때문이다.하지만 날씨도 덥고 고갯길 경사도
나를 질리게 만든다. 급하면 돌아가라는 심정으로 경사가 완만한 아파트단지 남쪽으로 우회하
여 절로 접근했다. 그렇게 발품을 판지 30분 만에 흥천사 일주문 앞에 도착했다.


▲  봄내음이 서린 흥천사 느티나무 - 서울시보호수 8-4호

흥천사도 엄연한 산사(山寺)인지라 속세에서 가려면 조금은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야 된다. 일
주문이 보이는 절 입구 3거리에 이르면(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산길) 아름드리 느티나무
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며 땀흘려 올라온 중생들을 격려한다.

이 느티나무는 350년 묵은 나무로 높이는 10m에 이른다. 둘레는 2.4m로 흥천사와 중생들의 보
살핌과 세월이란 양분을 먹으며 어엿한 노거수로 성장했다.


▲  흥천사 일주문(一柱門)

느티나무의 격려를 받고 왼쪽으로 가면 '삼각산 흥천사(三角山 興天寺)'라 쓰인 일주문이 중
생을 마중한다. 절 입구에 세워진 기둥 2개의 일주문은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
으며, 이 세상에 어느 누구 가리지 않고 반갑게 맞이한다. 일주문처럼 넓은 포용력을 지니며
살리라 다짐을 하지만 등을 돌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먹고 만다. 그래서 사람은 절
대 신이 될 수 없는 모양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그 서쪽으로 높다른 석축(石築) 위에 터를 닦은 흥천
사가 속살을 가린 채 자리해 있다. 주차장에서 경내(境內)로 인도하는 계단을 올라서면 가려
진 흥천사의 속살이 모습을 비춘다.


▲  흥천사 경내로 오르는 계단
계단을 올라서면 대방(大房)이 정면에 나타난다.


♠  정릉(貞陵)의 원찰로 지어진 조선왕실 최초의 원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울 흥천사(興天寺)

▲  석축 위에 자리를 닦은 흥천사의 외부


서울 시내 한복판인 돈암동(敦岩洞) 북쪽 산자락에 아늑하게 둥지를 튼 흥천사는 일주문에서 '
북한산 흥천사'를 칭하고 있다. 여기서 북한산(北漢山)은 좀 떨어져 보이긴 하지만 성북동과 돈
암동 산자락까지 엄연한 북한산의 일부이다. 다만 도로와 주거지로 인해 서로가 끊긴 듯 보이는
것이다.

흥천사는 신흥사(新興寺)란 이름도 가지고 있으며, 조선 왕실 최초의 원찰이다. 1397년 태조 이
성계(李成桂)가 정릉의 원찰로 창건했으며, 원래는 중구 정동(貞洞)에 있었다.

1. 왕실의 원찰 흥천사의 탄생
1396년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경복궁(景福宮)과 가까
운 지금의 정동 미국대사관저와 러시아공사관터 일대에 그녀의 능인 정릉(貞陵)을 만들었다. 참
고로 정동이란 지명은 정릉에서 유래된 것이다. 능을 도성 바깥도 아닌 도성(都城) 4대문 안에
둔 것은 그만큼 강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탓이다. 또한 그걸로도 성이 안찼는지 부인의 명
복을 비는 원찰 건립을 추진하여 1397년 정월, 정릉 동쪽(덕수초교와 서울시의회 일대로 여겨짐
)에 자리를 닦아 170칸 규모의 흥천사를 세웠다. 공사 감독은 당시 건축 경력이 상당했던 김사
행(金師幸)과 김주(金湊)가 맡았으며, 공사 기간 동안 수시로 현장을 찾아 공역에 동원된 일꾼
들을 격려하고 돈과 식량을 두둑히 내리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그 덕에 공사는 순조롭게 진
행되어 그해 9월에 뚝딱 완성되었다.
태조는 초대 흥천사 주지로 상총(尙聰)을 임명했으며, 그가 좋아하던 조계종(曹溪宗)의 본산(本
山)으로 삼았다. 또한 밭
250결을 내려 절 유지비에 쓰도록 했다.

절이 완성된 이후 태조는 매일 아침 흥천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어야 밥숟가락을 들었다고
하니 사별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종소리로 달랬던 모양이다.

2. 억불숭유(抑佛崇儒) 속에서도 번영을 누린 흥천사
1398년 6월 태조는 절 북쪽에 3층 규모의 사리전(舍利殿)을 지어 절을 장엄하게 꾸몄다. 그리고
통도사(通度寺)에서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당시 조선 유일
의 석가불 사리를 옮겨놓고, 불경과 여러 보물을 두었다. 사리전이 완공되자 태조는 우란분재(
盂蘭盆齋)와 강씨의 수륙재(水陸齋)를 열었다.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자신의 계모(季母)가 묻힌 정릉의 존재
를 입 안에 가시처럼 달갑지 않게 여겼다. 태조가 1408년 승하하자 정릉의 석물을 명나라 사신
의 숙소인 태평관(太平館) 보수와 나무다리였던 광교(廣橋)를 돌다리로 업그레이드하는데 죄다
동원했다. 또한 그것도 모잘라 1409년 정릉을 지금의 정릉동(貞陵洞)으로 추방시켜 사람들의 뇌
리에서 영원히 잊혀지게 만들었다. 허나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는 절을 잘 지켜달라는 태조의 유
언 때문에 건들지 않았다. 대신 절의 노비(奴婢)와 밭의 면적을 줄였는데, 그것도 태평관을 철
거하면서 남게 된 밭과 노비를 절에 넘기면서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1410년 절을 수리
하고 1411년 사리각을 중수했다.

세종 때는 1424년(세종 6년) 각 종파를 통합 정리하여 흥천사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삼았
으며, 전답을 두둑히 내려 승려 120명이 상주하는 큰 절로 성장했다. 1435년과 1437년 절을 수
리했으며, 1440년에는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했다. 1441년 3월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
찬회(慶讚會)를 열었으며, 1447년 세종은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하게 했다. 또한 1449년(세종 31년) 가뭄이 심하게 들자 흥천사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
는데, 몇일 뒤에 비가 내려 전국을 촉촉히 적셔주자 세종은 너무 기뻐 절 승려 140명에게 상을
내렸다고 하니 절의 규모가 얼마나 상당했는지 보여준다.

불교를 신봉했던 세조(世祖)는 흥천사에 큰 동종을 만들어 시주했으며, 1469년(예종 원년) 명나
라 황제가 불번(佛幡)을 선물로 보내와 흥천사에 봉안했다. 또한 1480년(성종 11년)에 절을 중
수했다.

3. 흥천사의 비참한 최후
불교를 지원하던 세종과 세조(世祖)가 붕어(崩御)한 이후 왕실의 지원이 감소하면서 잘나가던
흥천사에 적신호가 켜지게 된다. 연산군(燕山君)은 1503년 궁궐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곳
으로 옮기고 흥천사의 건축자재 일부와 불상을 양주 회암사(檜巖寺)로 옮겼다. 그리고 절은 궁
궐의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寺) 관아로 삼았다.

1504년 화재로 사리전을 제외한 전각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그 상태로 방치되어오다가
1510년(중종 4년) 3월, 4부학당의 유생들이 불교배척을 외치며 야음을 틈타 불을 지르면서 사
리전을 비롯한 흥천사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왕실의 원찰임에도 유생들이 아무렇지 않게
방화를 저지른 것은 중종과 당시 권력층의 묵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증발한 흥천사의 유일한 생존자인 동종(銅鍾, 보물 1460호)은 동대문과 광
화문을 떠돌아 현재 덕수궁(德壽宮) 광명문(光明門)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  흥천사 범종각(梵鍾閣)

▲  흥천사 극락보전


4. 신흥사에서 다시 태어난 흥천사, 다시 정릉과 이웃이 되다.

속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진 정릉 부근에 신흥암이란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릉이
선조 때 강씨의 후손 강순일의 노력으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고, 1669년 송시열(宋時烈)의 건
의로 정릉을 중수했는데, 마침 신흥암이 정릉과 너무 가까웠으므로 절을 석문(石門) 밖

합취정
(合翠亭)터로 옮기고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을 바꿨다. 그때부터 다시 정릉의 원찰 역할을 하게
되었다.

1794년(정조 18년) 승려 성민(聖敏)과 경신(敬信)이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겼고,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원으로 전국 8도에서 시주를 받아 크게 중창했다. 이때 극락
보전과 명부전, 대방(만세루)이 새롭게 지어졌다. 대원군은 신흥사와 정릉이 이웃한 점을 들어
중종 때 없어진 정릉의 옛 원찰, 흥천사란 이름을 쓰게하여 300년 동안 끊긴 옛 흥천사의 유지
를 잇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흥천사는 다시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고, 정릉과 다시 이웃하게 되
었다. 비록 다른 이름을 가진 절을 흥천사로 덮어쓰기 했다는 한계점은 있지만 말이다. 이름 변
경 기념으로 대원군은 '흥천사'란 편액을 내렸는데, 그것은 현재 만세루에 걸려있다. 이곳이 흥
천사 외에 신흥사란 이름도 지니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흥천사로 많이
불림) 그외에 1794년 지금의 자리로 절을 이전하면서 새로운 흥천사란 뜻에서 신흥사로 했다는
설도 있다.

흥천사로 거듭난 이후 왕족과 사대부(士大夫), 궁궐 상궁(尙宮)의 발길이 늘었으며, 고종의 아
들인
영왕(英王, 영친왕)도 5살에 다녀가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5.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머물던 원찰, 그리고 현재
조선이 사라지고 35년의 어둠의 시절을 겪는 동안 흥천사는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했다. 6.25시
절에는 격전지였던 미아리고개가 지척임에도 다행히 총알과 폭탄이 비켜가 고종 때 지어진 극락
보전과 명부전 등이 온전히 살아남았으며, 전쟁이 끝나자 순종(純宗)의 황후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 윤씨가 피난에서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 윤씨는
양식 1홉으로 하루를 지냈다고 하며, 그 1홉에서 매일 1줌 씩을 떼어 향과 초를 사들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만세루(대방), 용화전, 독성각
등 8~9동의 건물이 경내를 채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
과 명부전을 비롯하여 만세루와 괘불(掛佛), 흥천사 현판 등이 있어 절의 오랜 전통을 가늠케
한다. 또한 일주문 바깥에는 35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북한산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흥천사는 엄연한 산사이나 턱밑까지 밀려온 무자비한 개발의 칼질
앞에 고즈넉한 산사의 농도도 적지 않게 떨어졌다. 6.25이후 민가(民家)들이 절 부근까지 밀려
왔으나 그래도 서로 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절 바로 남쪽까지 밋밋한 회색 아파트
들이 폭풍처럼 몰려와 절을 굽어보고 있는 실정이며, 절을 둘러싼 삼삼한 숲도 야금야금 줄어들
고 있다.

흥천사는 조선 최초의 원찰로 의미가 깊으며, 비록 300년의 공백이 있으나 조선 왕실의 지원으
로 성장한 절의 하나로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워 성북동 길상사와 더불어 도심 속의 산사(
山寺)라 불릴만하다. 아직은 절의 인지도가 낮아 찾는 이는 많지 않으며, 도심 속에 박혀 있음
에도 한적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 멀리 나가기 힘들 때, 잠시 발걸음을 하여 속세
의 오염된 몸과 마음을 가다듬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인근에 정릉(도보 20분 거리)과 북악산길,
성북동 등의 명소가 푸짐하게 늘어서 있어 이들을 연계하여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도심 나들이
가 될 것이다.

※ 흥천사 찾아가기 (2011년 5월 기준)
*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5번 출구)에서 성북구마을버스 22번(10~15분 간격)을 타고 돈암2동주민
  센터 하차. 절까지 도보 3분.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절까지 1km, 도보 15분
* 4호선 한성대입구역(1,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돈암2동주민센
  터입구(흥천사)에서 하차, 성북구마을버스 22번을 타거나 도보 10분
* 절까지 차량 접근 가능하며, 절 밑에 주차장이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595 (☎ 02-921-1626)

▲  흥천사 명부전

▲  흥천사 대방에 걸린 신중탱화


♠  작지만 알찬 흥천사 둘러보기 (1) 만세루

▲  흥천사 만세루<萬歲樓 = 대방(大房)>

계단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만세루라 불리는 거대한 건물이 경내를 가리며, 정면을 막아
선다. 여기서 대방의 양 옆구리를 끼고 돌아야 가려진 경내의 속살이 나타난다. 동쪽을 바라보
며 자리한 만세루는 대방(大房)이라고도 불리며, 특이하게 'H' 구조를 띄고 있다. 대방은 조선
왕실의 원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로 왕족과 사대부들의 예불과 숙식 편의를 위해 지어졌는
데,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와 북한산 흥국사(興國寺, 고양시 지축동), 파주 보광사(普光寺)에도
이와 비슷한 구조의 대방이 있다. 대방은 귀족들의 편의 외에도 외부에서 경내가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역할도 한다.

만세루는 고종 때 지어진 건물로 흥선대원군이 남긴 흥천사 현판이 있으며, 19세기 후반에 조성
된 여러 불상과 불화(佛畵)들이 내부를 수식한다. 또한 대방이란 이름 그대로 방도 무척이나 많
다.


▲  만세루 현판

▲  흥선대원군이 친히 남긴 흥천사(興天寺) 현판
만세루 정면에 걸린 현판으로 글씨에 생명력이 깃들여있는 듯,
필체에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  만세루 중앙에 마련된 관음보살상
화려한 닫집 밑에 자리를 잡고 중생의 하례를 받는 관음보살
고종 때 조성되었다고 한다.

▲  만세루 좌측 벽에 걸린 신중탱화

▲  신중탱화 곁에 자리한 석가불과
제석탱화(帝釋幀畵)


▲  현왕탱화(現王幀畵)
현왕탱화는 사람이 죽은지 3일 뒤에 심판을 한다는 현왕(現王)과 그의 부하들을
그린 것이다. 다른 절의 현왕탱과 달리 등장 인물이 적어 매우 간결해 보인다.
(고종 때 제작됨)

▲  만세루 천정을 어지럽게 메운 연분홍 연등과 물고기의 물결
특이하게도 연등 밑에 풍경물고기 모형을 달았다. 문 밖에서 잔잔하게
바람이 불어오면 물고기는 조금씩 몸을 꿈틀거리며 풍경물고기 흉내를 낸다.
천정을 보는 내 눈이 얼마나 어지럽던지 ~~

▲  만세루 추녀 밑에 매달린 풍경물고기

절에서 풍경소리를 듣는 재미도 정말 쏠쏠하다. 혹 바람이 없어 풍경물고기가 가만히 쉬고 있는
경우는 손으로라도 그들을 흔들어 깨워 그 소리를 듣고 싶다. 풍경소리가 좀 단순하게 들릴 수
도 있겠지만, 듣는 순간 머리와 마음이 싹 정리가 된 듯, 뭔가 모르는 정신적 편안함이 밀려 오
는 것 같다.

고즈넉한 산사의 정적을 조용히 깨뜨려 주는 풍경물고기. 허공을 바다로 삼고 시원한 산바람을
파도로 삼은 물고기는 마치 신이라도 난 듯, 부산히 몸을 움직여댄다. 그가 맨 바닥에 혹 떨어
지지 않을까 꽉 붙들어 맨 바람방울(풍경)도 덩달아 춤을 추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아낌없이 속
베푼다.


♠  작지만 알찬 흥천사 둘러보기 (2) 극락보전 주변

▲  흥국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6호

만세루의 옆구리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면 근래에 만들어진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7층석탑이
나온다. 흥천사의 유일한 탑으로 따사로운 봄의 햇살에 한층 맵시가 빛나보인다. 탑 우측 넓은
공간에는 절을 찾은 중생에게 공양을 제공하는 임시 야외 공양간이 있는데, 점심을 먹은지 2시
간도 되질 않았는데, 배고픔이 밀려온다. 기왕 초파일에 왔으니 공양은 해야겠지, 금강산도 식
후경이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지만 일단은 절부터 싹 둘러보고 먹기로 했다.

탑을 지나 대방의 뒷쪽으로 가면 계단 위에 이곳의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이 나를 굽어본다. 극
락보전(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한 건물로 신흥사 시
절부터 있던 것으로 보이며, 1853년(철종 4년)에 중수했다. 흥천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이 절은 창건 당시부터 아미타불을 중심 불상으로 모셨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공포(空包) 덩어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이다.
건물 정면에는 꽃창살 창호를 달고 좌,우 뒷면은 판벽으로 했으며,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우물천정이다.
문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 두 기둥 위에 용머리 장식
이 건물을 수식한다.

우측 명부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19세기) 사찰 건축물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화려한 장
식과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또한 서울에 몇 안되는 조선시대 사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불을 비롯한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로 신중탱화와 아미타
구품도(阿彌陀九品圖) 등의 불화가 내부를 수식한다.


▲  수려한 닫집과 불상으로 중생의 시선을 붙잡은 극락보전 불단
고종 때 조성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근래에 만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수많은 손을 지닌 관음보살이 그의 좌우를 받쳐준다.

◀  근래에 심어진 흥천사 7층석탑
탑신(塔身)이 위로 올라갈 수록 일정하게
줄어드는 균형잡힌 맵시를 자랑한다.

▲  오호~~ 흥천사 괘불의 화려한 외출

극락보전과 대방 사이의 좁은 공간에 4월 초파일 행사를 위한 야단법석(野壇法席) 자리가 차려
져 있었다. 물론 행사는 오전에 끝이 났고, 한참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법단에는 온갖 과일
이 곱게 차려져 있고, 평소에는 정말 구경하기도 힘든 거대한 괘불이 하늘을 가리며 걸려있다.
초파일 사찰 순례의 장점은 바로 이런 괘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괘불은 2004년 서울 보문사(普門寺)에서 처음 본 이래, 지금까지 딱 3번 친견했다. 그것도 모두
초파일에 본 것이다. 그만큼 그를 만나는 것은 가뭄에 콩나듯 힘들다. 당당하게 걸린 괘불을 보
니 이곳을 다시 찾은 보람이 나를 뿌듯하게 만든다.

흥천사 괘불은 1832년에 제작되었다. 가운데 석가불을 중심으로 3명의 부처, 즉 삼세불(三世佛)
이 그려진 형태로 19세기에 수도권 지역에서 삼신불 괘불이 크게 유행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화승(畵僧)을 크게 배출했던 수락산 흥국사 출신 승려들이 그렸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괘불의
시작은 조선 중기로 여겨지며, 주로 초파일과 수륙재 등의 행사나 기우제와 기타 제사 의식 때
법당 앞에 걸고 의식을 치룬다. 그외에는 비공개로 안전한 곳에 보관된다. 깊숙한 곳에서 잠을
자다가 초파일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온 탓일까 괘불에 그려진 삼신불의 모습이
자못 즐거워보인다. 허나 야단법석을 정리하고 괘불을 내려 대방으로 옮기면 오랫동안 햇살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  극락보전과 만세루 사이에 마련된 야단법석(野壇法席)
아무도 없는 법석에 어지럽게 널부러진 방석들이 행사가 이미 끝났음을 알린다.

▲  아기부처의 희열(喜悅), 관정(灌頂)의식의 현장

괘불 옆에 마련된 관정의식의 현장, 허나 내가 절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의 머리가 젖어있는 것
을 못봤다. 초파일이긴 하지만 이곳을 찾은 중생이 무척 적었기 때문이다. 절을 둘러보는 동안
승려와 일을 돕는 사람을 제외하고 한 10명 봤나 그랬으니, 그에 반해 같은 서울 안에 있는 조
계사(曹溪寺)와 봉은사(奉恩寺), 화계사(華溪寺)는 사람들로 미어터져 크게 대조를 보인다. 여
기가 과연 서울 안에 들어앉은 고찰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용화전(龍華殿)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용화전은 56.7억년 후에 온다는 미륵불(彌勒佛)을 모신 공간이다. 해방
이후에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건물 현판이 있는 가운데 칸만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좌우로 1
칸씩 넓혀 지금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용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로 갖가지 꽃들이 건물 주변을 화사하게 수를 놓아 그 아름다움 풍
경에 넋을 잃을 지경이다.


 ▲  용화전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입상
 

▲  극락보전 뒤쪽 바위에 마련된 관음보살상

극락보전 뒤쪽으로 언덕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그래봐야 몇 계단이 고작이다. 그 계단의 끝에
구멍이 여럿 패인 바위가 있고, 그곳에 하얀 맵시를 지닌 관음보살상과 산신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미 용화전에 관음보살이 있는데, 이곳에도 관음보살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인자한 누님
처럼 자애로운 인상으로 중생을 맞이하는 관음보살, 그의 표정 앞에 나의 마음도 설렌다. 그리
고 그의 우측 바위 구멍에는 적당한 감실(龕室)을 만들어 산신(山神)과 호랑이를 두어 산신각(
山神閣)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산신상은 도난을 우려해 유리로 감실을 막았다.


♠  작지만 알찬 흥천사 둘러보기 (3) 명부전, 그리고 마무리

▲  흥천사 명부전(冥府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7호

극락보전에서 우측으로 가면 맞배지붕을 지닌 명부전이 온다.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
과 저승이라 불리는 명부(冥府)의 주요 식구를 봉안한 건물로 1855년에 지어졌다. 극락보전 다
음으로 오래된 건물로 1894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좌우에 풍판
을 달았다.

극락보전과 마찬가지로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양식으로 기둥 위에 용머리를 장식하고, 안으로
용의 꼬리를 새겨 건물의 품격을 높였으며,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시왕(十
王), 인왕상(仁王像), 판관(判官) 등이 모셔져 있다. 그들 뒤로 지장탱화와 시왕을 그린 불화가
그들을 든든히 받쳐준다.

조선 후기 사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며,
서울에 몇 없는 불교 건축물로 극락보전
과 더불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특히 명부전의 현판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점이 매우 이채로우며, 보통 현판의 색깔인 검은색 바탕이 아닌 붉은색 바탕에 글씨가 쓰인 것
이 매우 돋보여 마치 중국 양식의 건물을 보는 듯 하다.

◀  세로로 걸린 명부전 현판의 위엄
붉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쓰여진 글씨가
매우 돋보인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지만 필체의 힘이 넘쳐 보인다.


 ▲  명부전 외부 벽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四天王)의 하나를 그린 듯 싶다.
 

▲  흥천사 공양

약 40분에 걸친 흥천사 관람을 마무리하고 점심공양을 들었다. 점심을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
지만 공양을 보니 금세 배고픔이 밀려온다. 초파일을 기리고자 절에 왔으니 당연히 공양은 해야
되겠지. 그 전통은 해를 거르지 않고 계속 이어져오고 있으니 말이다.

썰렁한 공양간에는 밥을 먹는 사람이 2명 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탓도 있겠지만 너무 사
람이 없다. 급식판에 7층석탑만큼 하얀 쌀밥과 동치미, 콩나물, 고사리 등의 채소 3종류와 미역
국을 받고 자리에 앉아 즐거운 공양시간을 갖는다. 이곳 공양은 특별한 것은 없다. 반찬이나 국
도 집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허나 초파일 밥이라 그런지 평소 먹성이 좋아서 그런지
뚝딱 그릇을 비웠다.

흥천사의 정성이 담긴 공양을 끝으로 4월 초파일 흥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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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1년 5월 12일부터
 * 최종수정 - 2011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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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골선비 | 2011/05/18 21:20 | 서울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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