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 겨울 산책 (오목대, 한벽당...)


' 호남의 오랜 중심지 ~ 전주 나들이 (전주한옥마을 명소들) '
전주 한벽당
▲  한벽청연의 현장, 전주 한벽당(寒碧堂)


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海內)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
  에서 즉흥으로 지어 부른 대풍가(大風歌), 태조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 연회에서
저 시를 읊었다.

천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홀로 다다르니 가슴에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턴 부여국(夫餘國)은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百濟城)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하염없이 고개 돌려 옥경(玉京, 개경)만 바라보네

  * 이성계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가 착잡한 마음에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읊은 우국시(憂國詩)
* 다음블로그글 보러가기 ☞ http://blog.daum.net/snowlove78/13757379



조선왕실의 영원한 성역 경기전(慶基殿)과 인근에 있는 호남 최초의 성당인 전동성당(全洞聖堂
)을 오랜만에 둘러보고 전주한옥마을의 중심을 가르는 태조로(太祖路)을 지나 한옥마을 동쪽에
솟아난 오목대를 찾았다. 서울의 인사동(仁寺洞) 골목과 거의 비슷하게 꾸며진 태조로는 찻집,
주막, 다양한 공예관 등이 즐비하여 인사동과 북촌골목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다.

공예품전시관을 지나면 한지관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목대로 오르는 나무 계단길이
있다. 계단길 외에도 공예품전시관 주차장에서 직진하여 500년 묵은 당산나무를 거쳐 오목대의
서남쪽 허리로 오르는 길도 있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계단을 3분 정도 오르면 이성계가 대풍가를 불렀다는 현장 오목대이다.


♠  태조 이성계가 종족(宗族)들을 모아 연회를 배풀며 새 왕조의 개창을
암시했다는 현장, 오목대(梧木臺) -
전북 지방기념물 16호

전주한옥마을 동쪽 높다란 언덕 꼭대기에 둥지를 튼 오목대는 1380년 이성계가 전주이씨 종족들
을 모아 연회를 베풀며 새로운 나라를 세울 의사를 은연중 밝혔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
날에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사연으로 오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가 끝없이 기울어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倭寇)는 고려와 명나라를 침범하
여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개경(開京)에서 가까운 강화도까지 쳐
들어와 선왕(先王)의 어진(御眞)까지 약탈해갈 정도였다. 고려 정부는 왜구를 때려잡고자 안간
힘을 썼으나 충렬왕(忠烈王) 이후 몽고의 통제로 강력했던 고려의 해군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토벌에 적지 않은 고생을 겪었다. 다행히 최무선(崔茂宣)이 화약(火藥)을 개발하여 1380년 진포
(鎭浦, 금강 하류)에서 왜구를 500척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면서 상황이 다
소 반전이 된다.
하지만 그때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왜구 잔당들은 배를 버리고 옥천, 상주 등 내륙지역으로 줄
행랑을 치면서 고려 정부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
都巡察使)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했다.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인 의제(義弟)인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남원 운봉(
雲峯)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왜구 패거리를 죄다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는데. 이 전투가 그 빛나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대승을 거두고 귀경(歸京)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서 전주 이씨 종족(宗族)들을 불러 모
아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高祖)의 대풍가
(大風歌)를 큰 소리로 부르며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뜻을 은은히 내비췄다고 한다.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그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행위에 적지 않은 역
겨움을 느끼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말을 달려 단숨에 남천(南川, 전주천 상류)
을 건너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말을 멈추고 개경(開京)이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시(憂國詩) 한 수를 읊고는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이후 이성계는 1388년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서 명나라를 향해야 할 창
을 개경으로 돌렸다. 개경(開京)을 점령하여 정몽주와 최영(崔瑩) 등 고려의 보루(堡壘)들을 죽
이고 끝내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다.

1900년 고종(高宗)은 그런 자랑스러운 조상, 태조를 기리고자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다. 비
신(碑身)에는 '太祖高皇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는데, 이는 고종의 친필이
라고 한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전주한옥마을을 묵묵히 굽어보는 오목대는 한옥마을과도 길이 이어져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된다.
허나 이곳까지 오르는 답사객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서 한옥마을과 달리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하다.

예전에 비각 주변으로 철제(鐵製)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근래에 이를 모두 철거하여 비각 앞
까지 접근이 가능하며 비각 좌우로 멋드러지게 가지를 올린 나무 여러 그루가 비석을 호위한다.


▲  고종이 세운 비석을 소중히 품에 안은 오목대 비각

▲  오목대 동쪽에 마련된 누각(樓閣)

오목대 동쪽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 이후에 만든 것으로 누각의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오목대나 오목대 누각이라고 부르
면 된다. 이성계가 오목대에서 전주이씨 종족을 모아 연회를 베풀 때 이곳에는 누각이나 정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거나 막사(幕舍)를 만들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누각은 이성계가 연회를 베풀던 장소를 상징하여 만든 것으로 시인 묵객들이 남긴 시액(詩額
)들이 어지럽게 누각 평방(平枋)위에 걸려 있다. 그중에서도 이성계가 읊었다는 대풍가 시액이
나그네의 눈길을 잡아맨다. 대풍가는 한글과 한문 버전이 따로 걸려있다. 시문의 내용을 중얼거
리듯 읊으며 누각 난간에 걸터앉아 잔잔히 불어오는 그리 차갑지 않은 겨울바람을 즐겨본다.


▲  대풍가 한문버전

▲  대풍가 한글버전

집안 종족들과 회포를 풀며 술에 거하게 취한 이성계가 어떤 태도로 저 시를 읊었는지 가히 상
상이 간다. 으뜸석에 앉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족과 부하장수를 바라보며 자신이 황제
가 된 양 가슴을 크게 피며 거만하게 대풍가를 읊었을 것이다. 종족과 부하장수는 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을 것이고, 그 광경에 속이 단단히 뒤틀린 정몽주는 술잔을 상에 쾅 내려놓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

예로부터 전주의 중심부인 풍남동(豊南洞)과 교동(校洞) 일대에 넓게 조성된 전주한옥마을은 서
울의 북촌(北村)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2곳 밖에 없는 대규모 한옥밀집지역이다. 전주시의 꾸준
한 홍보와 정비사업으로 전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부상하여 많은 답사객들이 찾아온다.


전주한옥마을은 총면적이 76,320평에 이르며, 약 900여 채의 전통한옥이 모여있다. 대부분이 왜
정(倭政) 이후에 지어진 한옥으로 100년 이상 된 집은 거의 없다. 이곳에 기와집이 많이 뿌리를
내린 것은 왜정이 전주부(全州府)의 중심이던 전주성(全州城)을 말끔히 부시고 도로를 뚫으면서
성 밖에 사던 왜인들이 성 안으로 마구잡이로 기어들어와 물을 흐려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크게 반발한 전주 사람들은 전주를 지키고자 너도나도 한옥을 지어 살면서 거대한 한옥마
을이 된 것이며, 왜정 때 한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향수가 진하게 서린 고풍(古風
)스러움을 선물하고 있다. 몇몇 한옥은 북촌의 한옥처럼 문화공간이나 공예관, 찻집, 식당, 민
박집이나 한옥체험장, 전통체험관 등으로 탈바꿈하여 나그네의 호기심을 부드럽게 자극시킨다.


▲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 동쪽
(공예품전시관과 한지관 등이 정면에 보인다)

▲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는 구름다리 (오목교)

▲  오목교 건너편에 바라본 오목교와 오목대

오목대 동쪽에는 남원(南原)으로 달리는 17번 국도(기린로)가 뚫려있다. 전주 도심을 우회하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수레의 굉음이 귀를 진하게 때려댄다. 길 건너편 동쪽에는
이목대가 있는데, 도로 위에 육교 같은 다리를 놓아 오목대와 이목대를 이어주고 있다. 다리의
이름은 '오목교'로 '구름다리'라고도 불린다. 겉으로 보면 도로로 단절된 양쪽을 이어주는 육교
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일쑤지만 이 다리에도 깊은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원래 오목대와 이목대는 하나의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이 1931년 전라선(全羅
線) 철도를 내면서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던 산줄기를 싹둑 끊어버렸다. 전라선이 개통된 이후,
이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남원에서 전주로 올라오는 열차가 이곳만 지나면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무임승차로 열차에서 뛰어내린 사람
이 많았다고 한다.
혈맥(血脈)의 단절로 기차의 속도로 느려진다고 여긴 전주 유림들은 오목대와 이목대를 연결시
켜야 된다고 민원을 넣어 1960년경에 오목교를 설치했는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기차의 속도
가 빨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전라선이 동쪽으로 이설되면서 오목교는 철거되고, 옛 전라선 자리에 기린로가 놓이면
서 1987년 지금의 오목교를 만들었다. 오목교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승암산(僧巖山)의 산줄
기가 단절되어 사고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  오목대를 마주보는 이목대(梨木臺)

오목교 구름다리를 건너면 이목대라 불리는 비각이 나그네를 맞는다. 이곳은 오목대와 마찬가지
로 비석과 그것을 품에 안은 비각이 전부이다. 오목대가 오동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이목대는 배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던 언덕이었다. 그래서 이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목대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의 유허(遺墟)로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 시절부터 후손들이 살던 곳이라 전한다. 이안사는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고려를 등지
고 원나라 땅인 함경도(咸鏡道)로 넘어가 새롭게 터를 일구었다. 태조는 그를 목조(穆祖)라 추
존했으며, 1900년 고종 황제가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碑文)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
)'라 쓰여 있다. 비문은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완산지(完山誌)'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이안사와 관련된 몇가지 설화가 적혀있는데,
그는 발산(鉢山) 남쪽 장군수(將軍樹)란 나무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진법(陣法) 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그 현장이 바로 이목대라고 한다. 아마도 집 앞에서 그 흔한 전쟁놀이를 했던
모양이다. 또한 호운암(虎隕岩) 설화도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각에 제대로 갇힌 듯 답답해 보이는 이목대 비석

어느날 이안사는 애들을 이끌고 병풍리 좁은목에 놀러 갔다가 비를 만났다. 그들은 급히 근처에
있는 바위굴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호랑이 1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났다.
호랑이는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로 으르렁거려 분위기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애들은 무서움에 질질 짜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안사가 침착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호랑이가 한꺼번에 우리를 물지를 못할 것이다. 기껏 해봐야 한 사람 밖
에는 물어가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 모두 웃옷을 벗어 던져서 호랑이가 무는 옷의 주인이 모두
를 대신해서 호랑이한테 가도록 하자'
그 말을 들은 애들은 더욱 겁을 먹으며 말했다.
'우리 가운데 형이 제일 나이가 많으니 형부터 던져봐요~'
'좋아. 내가 먼저 던질테니 호랑이가 내 옷을 받아 물면 내가 흔쾌히 호랑이한테 가겠다'
그러면서 웃옷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졌다. 그러자 호랑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옷을 덥석
물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안사는 속으로 '아오 젠장~~'을 수없이 중얼거리며 약속대로 호랑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도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눈을 감으며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굴 밖으로 나가니 갑자기 천둥이 콰당치면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호랑이는 보이
지 않고, 굴은 무너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즉 그는 살고 나머지 애들은 굴에 갇
혀 죽은 것이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에게 왕기(王氣)가 깃들여져 산신령이 호랑이로 변해 그를 살려낸 것이
라 여겼다. 이 설화는 태조 이후에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차원에서 생겨나거나 윤색
된 설화일 뿐이다. 태조 왕건에게도 이와 비슷한 설화가 있으니 제왕에게는 꼭 갖춰야 될 설화
인 모양이다.
이목대는 오목대와 한덩어리로 묶여 전북 지방기념물 1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오목대, 이목대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① 서울과 주요 지역에서 전주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15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다.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여수행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고양, 의정부, 인천, 부천, 안양, 수원, 안산, 대전(유성, 서대전), 군산, 광주, 순천, 대구
  (서부). 울산, 부산, 창원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익산, 용산행 전라선 열차 이용
② 전주 현지 교통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남부시장이나 풍남문을 경유하
  는 시내버스를 타고 전동성당(한옥마을) 하차. 이들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는 물 흐르듯 빈번하
  게 다니므로 교통은 편하다. 전동성당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가면 풍남
  문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태조로(太祖路)로 진입하여 7분 정도를 가면
  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그 언덕 정상에 바로 오목대가 있다.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병무청 방면 시내버스로 병무청
  에서 하차하여 기린로를 따라 남쪽으로 도보 15분
* 금암광장에서 429번(1일 12회), 486번(1일 18회) 시내버스를 타면 오목대 앞까지 간다. 허나
  차가 별로 없고, 전주교대와 좁은목으로 삥 돌아서 가므로 교통편이 좋은 전동성당에서 내려
  걷는 것이 속 편하다.
* 오목대에서 전주한옥마을과 반대방향(동쪽)을 보면 기린로란 큰 도로가 있다. 도로 위에 걸린
  오목교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이목대 비각이다.
③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 순천~완주고속도로 → 동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전주 방면 → 인후동(모래내)
  → 기린로 → 오목대
* 호남고속도로 → 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조촌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기린로 직진 → 
  오목대
* 오목대 부근 주차장소는 공예품전시관이나 한벽당 부근 전통문화센터에 하면 된다.
* 관람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3


♠  전주8경의 한 곳, 한벽청연(寒碧晴烟)의 현장
한벽당(寒碧堂)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5호

한벽당은 전주천변 가파른 바위에 터를 닦아 들어앉은 정자로 전주 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
晴烟)의 현장이다. 
승암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전주천을 뜰로 삼은 이곳은 1404년 월당 최담(月塘 崔霮)
이 낙향하여 지은 별장으로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달의 연못이란 뜻에 월당루(月塘樓)라 하
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벽당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후대 사람이 '벽옥한류(碧
玉寒流)'란 시귀에서 '한벽(寒碧)' 2글자를 따와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
모의 팔작지붕 정자로 동쪽에 따로 별채를 두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전주 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의 명승지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구름처럼 찾아들
던 곳이다. 또한 상관계곡의 물줄기와 의암, 은석 등 여러 작은 골짜기의 물이 합쳐져 한벽당
앞으로 흐르는데, 옛 사람들은 그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와 같다고 시를 지었으며,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8경의 으뜸으로 삼았다.

바위 위에 교묘히 둥지를 틀어 전주천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가히 단아함 그 자체이나, 1931
년 뒤쪽 바위에 전라선 철마가 땅굴을 파고 달리면서부터 운치가 서서히 녹슬기 시작했다. 전라
선은 그나마 훨씬 동쪽으로 이설되어 더 이상 시끄러운 기적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정자 바로 앞에 기린로란 넓은 신작로가 생기면서 그림 같은 풍경은 많이 손상되어 버
렸다. 비록 정자를 비롯하여 주변 숲과 바위는 온전하지만,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4발 달린 수
레들이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나가니 예전의 시를 읊고 낮잠을 즐기던 그 고즈넉한
분위기는 이제 옛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  승암산 서쪽 바위에 또아리를 튼 한벽당

한벽당은 기린로가 지나는 한벽교 바로 옆에 있고 정자로 오르는 계단은 바로 다리 밑에 있다.
허나 한벽교에서는 보기와는 달리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없어 접근이 불가하고 무조건 전주천 산
책로로 내려가야 된다. (이목대와 다리 중간에 옛 전라선 터널을 이용하거나 한벽교 북단 서쪽
으로 내려가면 됨)

한벽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한벽교 바로 밑에 있어 운치가 상당히 떨어지는데, 바위를 의지하며
베풀어진 돌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면 차분하고 단아한 모습의 한벽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정자
안으로 발을 들일 때는 신발을 섬돌에 두고 맨발로 들어서야 되며, 내부에는 시인,묵객들이 걸
어놓은 현판들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이경전(), 이경여(
), 이기발(), 김진상() 등 19명의 문인들이 한벽당에 올라 지은 시문이 전해
오고 있어 당시의 풍류를 느끼게 한다.

누각에 앉아 전주천을 중심으로 좁게 보이는 천하를 바라보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라곤 17번 국
도를 질주하는 수레들의 요란한 굉음들 뿐이다. 상황이 이러니 어찌 옛날처럼 차분하게 사색에
잠겨 있을 수 있겠는가..? 문명의 이기에 희생된 한벽당의 풍경은 서울 세검정(洗劍亭)과 다를
것이 없다. (서울 세검정 관련 답사기 ☞ 보러가기)

▲  별채를 좌측에 품은 한벽당 전경

▲  한벽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계단 바로 위가 기린로가 지나는 한벽교이다.


▲  한벽당 기적비(紀蹟碑)
한벽당의 내력을 소상히 적은 비석이다.

▲  전주천 산책로에서 쳐다본 한벽당
나는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90도로 그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프지만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굽어보며 전주천과 나그네를 바라본다.

▲  한벽당 내부에 걸린 현판
필체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한벽당 3글자, 누구의 글씨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한벽당에는 내부에도 정자의 이름을 알리는 현판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  한벽당 내부에 걸린 여러 시액(詩額)들
한벽당을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는 옛 사람들의 시문들
시문의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깨알같은 글씨가 무수히 담긴 한벽당 중수기(重修記)

▲  어여쁜 꽃단청이 그려진 한벽당 천정

샹들리에가 아름답다 한들 저 천정에 그려진 화사한 꽃그림만 할까? 굳이 불을 밝히는 등이 없
어도 앙증맞게 피어난 꽃잎으로 한밤에도 환할 것 같다. 거기에 전주천에 뜬 달님까지 한벽루
를 비추며 조명을 자처하니 굳이 현대식 조명시설은 필요없을 것이다.


▲  한벽당 밑 바위에 진하게 새겨진 바위글씨
○화담(?花潭)이라 쓰여 있다. 앞 글자는 '도'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음


▲  기적소리의 추억이 서린 옛 전라선 터널
한벽당 뒤쪽에는 옛 전라선 열차가 지나다니던 터널이 남아 있다. 열차의 기적소리와
굉음이 아련하게 들려올 것 같은 이 터널은 전라선이 시내 외곽으로 이전된 이후
사람들만 통행하고 있다. 수레는 통행 불가

▲  겨울에 잠긴 전주의 젖줄 전주천

전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전주천은 겨울제국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숨을 죽여 봄을 잉태하고
있다.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 오면 거추장스러운 얼음과 눈을 박차며 눈을 깰 것이다.

◀  전라선 옛 터널 앞에 있는 월당 선생 찬시
비(讚詩碑)
한벽당을 세운 최담 선생의 찬시비이다. 최담
은 조선개국공신으로 1402년 전주로 낙향하여
별장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한벽당은 그의 작
품이다.

한벽당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429, 486번 시내버스를 타고 한벽당 하차, 허나 배차간격
  이 무지 길다. (429번은 1일 12회, 486번은 1일 18회 운행)
* 전주역,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빈번하게 다니는 남부시장, 교도
  소, 상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남부시장 하차, 버스에서 내려 왼쪽으로 걸으면 바로 전주천
  과 싸전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둑방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한벽교를 지나서 한벽당이 모
  습을 비춘다. 가는 중에 전주향교와 동헌(東軒), 강암서예관이 있으며, 전주향교를 지나면 전
  주의 별미(別味)인 오모가리탕을 취급하는 주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725, 752, 782, 78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좁은목 하차, 좁
  은목4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전주천 다리(한벽교)를 건너면 한벽당이 보인다.
* 주차는 전통문화센터를 이용하면 된다. (오목대 부근의 공예품전시장도 괜찮음)
* 오목대에서 이목대를 거쳐 남쪽으로 도보 10분 거리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5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글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2년 1월 9일부터    


Copyright (C) 201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by 백사골선비 | 2012/01/16 08:12 | 전북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 덧글(0)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양 노고산(한미산) 흥국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양시 흥국사(興國寺) '

▲  흥국사 5층석탑과 약사전
* 다음블로그글 보러가기 ☞ http://blog.daum.net/snowlove78/13757365


         
    朝來有心喜   아침이 다가오니 기쁜 마음이 있고 
             尺雪驗豊微   수북하게 쌓인 눈에 올해도 풍년이 드는 것을 알겠구나
  
          * 1770년 겨울, 흥국사에서 하루를 머문 영조(英祖) 임금이 다음날 아침
            절 뜨락에 수북히 쌓인 하얀 눈을 바라보며 지은 시


늦가을이 아름답게 하늘 아래 세상을 수놓던 11월 초, 고양시 노고산(老姑山)에 안긴 흥국
사를 찾았다. 이곳은 2005년 4월 초파일에 다녀간 적이 있던 곳으로 절 입구까지는 서울도
심에서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이 10분 내외 간격으로 강물 흐르듯 다니
고 있어 교통은 착한 편이다.

절 입구에 내려서면 제일 먼저 흥국사를 알리는 하얀 돌의 거대한 표석이 중생을 맞이한다.
표석을 지나면 속세와 절을 이어주는 다리 사곡교가 창릉천 위에 반듯이 놓여있다. 창릉천
(昌陵川)은 북한산과 노고산
에서발원한 계곡물이 한데 모여 이루어진 하천으로 서울과 경
기도 고양시(高陽市)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흥국사가 있는 다리 북쪽은 경기도 고양
시, 버스정류장이 있는 다리 남쪽은 서울 은평구(恩平區) 땅으로 조그만 다리 하나를 사이
에 두고 행정구역이 싹 바뀌는 것이다.
또한 흥국사는 고양시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오로지 이곳 사곡교가 유일
하다. 그래서 고양시내에서 갈 경우에도 반드시 서울 땅을 거쳐야 된다.

창릉천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낙엽에 번뇌를 부탁하며, 다리를 건너면 절골마을<사곡(寺谷)
마을>이 나온다. 흥국사 밑에 자리한 이른바 사하촌(寺下村)으로 길가에 마을의 이름을 알
리는 조그만 표석이 물끄러미 서 있다.

마을에서 절까지는 시커먼 신작로가 놓여져 있다. 늦가을이 살며시 내려앉은 그 길에는 울
긋불긋 타오른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중생을 반긴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
들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물론 돌아서면 그 깨달음도 잊게 된다.
바람의 무심한 빗자루질에 흩날리는 낙엽들은 길을 걷는 이들을 우울쟁이로 돌변시킨다.

절골마을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부처의 세계를 알리는 일주문(一柱門)이 나온다. 남양주
수락산(水落山) 흥국사와 닮은꼴로 특이하게 평방(平枋) 앞에 절의 이름을 담은 현판을 달
았다. 현판도 '~~ 山 ~~ 寺'라고 쓰인 대신 아주 간단하게 '興國寺' 3자로 마무리 한 것도
이색적이다. (수락산 흥국사 답사기 ☞ 보러가기)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여닫는 문짝은 없으며 중생과 답사객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평등
하게 맞이하여 중생들에 대한 부처의 아낌없는 마음을 표현한다. 신(神)과 동물 사이로 어
중간하게 들어앉은 인간들이 저 문의 절반이라도 닮았더라면  이 세상은 정말로 살만한 세
상이 되었을텐데, 역시나 그런 세상은 꿈속에서나 존재하는 것 같다.


일주문 주변에는 수레가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으며 한쪽 구석에는 약수터가 있다.
문을 들어서면 길 오른쪽에 절의 내력이 빼곡히 담긴 사적비가 나오며, 그 길의 끝에는 흥
국사가 자리해 있다.

◀  흥국사를 알리는 거대한 표석
오늘도 흥국사를 찾아오는 중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그렇게 서 있다.


▲  다가올 겨울의 제국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인 창릉천

▲  절골마을 마을회관 노송(老松)
흥국사 약사불의 불력(佛力)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그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절(흥국사)을 향해 45도 허리를 구부렸다.

▲  늦가을에 잠긴 흥국사 가는 길
저 길의 끝에는 약사도량 흥국사가 있다.

▲  낙엽을 수북히 뒤집어 쓴 흥국사 일주문(一柱門)
나무에서 버림받은 낙엽들의 마지막 안식처인가 보다.

◀  흥국사 사적비(事蹟碑)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절의 오랜 내력
(來歷)이 담긴 높이 3m의 사적비가 있다.


♠  노고산(한미산)에 안긴 아늑한 산사, 약사도량과 템플스테이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 노고산 흥국사(興國寺)


▲  흥국사 약사전(藥師殿)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57호

흥국사는 말 그대로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절이다. 비록 불교와 관련된 이름은 아니지만 나라
의 흥성함을 뜻하는 좋은 이름이다 보니 흥국사란 이름을 지닌 절이 여럿 많으며 서울 주변에만
2곳이 성행중이다.
서울 주변의 흥국사―고양시 흥국사, 수락산 흥국사―는 모두 조선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절
로 왕실과 지배층의 후원이 상당했다. 절에선 그들의 후원에 부응하려는 차원에서 기존의 이름
을 과감히 내던지고 흥국사로 이름을 바꿨는데, 신라나 고려처럼 호국(護國) 사찰의 성격보다는
왕실과 집안의 안녕과 조상의 명복을 기원하는 원찰(願刹)의 성격이 강했다.


북한산의 서쪽 줄기인 노고산<老姑山, 한미산(漢美山)> 동쪽 자락에 안긴 흥국사는 조계종 소속
으로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한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러고 보
니 남양주 수락산의 흥국사도 우연인지 똑같이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다.

1. 믿을 수 없는 흥국사의 창건 시기와 그 이유
'미타전 아미타불 복장 연기문(彌陀殿 阿彌陀佛 腹臟 年紀文)'에 의하면 신라가 한참 백제의 잔
여 세력을 때려잡던 661년 어느 날,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북한산 원효봉에서
불도를 닦다가 느
닷없이 서북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그 기운을 쫓아 이곳에 이르니 서기
(瑞氣)를 발하고 있던 석조약사여래불이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으로 앞으로 많은 성인(聖人)들이 배출될
것이다'
하면서 절 이름을 흥성암(興聖庵)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 흥성암이 바로 흥국사의 전신
(前身)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곧이 곧대로 믿으면 정말 곤란하다. 흥국사가 정말 원효대사가 세웠는지 검
증도 되지 않았고, 그 시절 신라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도 한가롭게 절을 세울만한 상황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던 신라도 그 시절까지만 해도 왕경(王京)인 경주(慶
州) 지역에만 거의 절이 세워지던 상황이었다. 또한 흥국사가 있는 북한산성(北漢山城) 주변은
고구려와 가까운 신라의 북서쪽 전방으로 자주 전쟁이 터졌으며, 절이 창건되었다는 661년에도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게다가 원효대사는 그 당시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
며 불교 대중화에 힘쓰고 있었다.

2. 661년 원효대사의 행적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먹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그는 태종무열왕(太宗
武烈王)과의 친분으로 과부로 홀로 지내던 그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왕의 국정(國政)을 돕는 한편,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民心)을 달래고자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
면서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로 밀어내고 점차 신라 불교의 일인자로 커지게 된다.
       
그러던 중 661년, 당나라 황제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
겠지'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한다. 이번 고구려 정벌에는 당나라의 이
름있는 맹장(猛將)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10만이 넘는 대군을 파견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에 버금가는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죄다 데리고 가면서 고구려 정벌에 대한 자
신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얼어붙은 요하(遼河)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용케도 평양 부근 사수(蛇水, 지금의 합장강으로
대동강의 지류)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에 10만 대군은 완전
히 전멸하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은 모두 목 없는 귀신이 되어버린다.

한편 평양 서쪽으로 기어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군대가 보기좋게 궤멸(潰滅)을 당하
자 꼼짝없이 고립을 당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날씨도 춥지, 식량까지 부족하지, 고구
려군이 언제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취해갈지 모르는 그야말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였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목을 붙잡으며 간이 제대로 쫄깃해진 소정방은 신라로 서둘러 전령을 보
내 식량과 원군을 요청했다.

당나라에 저자세를 취하며 비위를 맞추느라 바쁘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청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허나 날씨도 매우 춥고, 고구려 땅 깊숙한 곳이라 원군을 보내는 것도 여의치가 않아 고민하다
가 김유신(金庾信)에게 군사와 군량을 수송케 하였는데 이때 분황사에 머물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는 그들을 때려잡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하며 기다렸다. 이를 소정방이 알아채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
는데, 그 암호문을 원효가 해독하여 숨어있던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 수송의 임무를
마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의 원효대사의 행적들이다.

3. 1천 년의 공백을 깨고 17세기 이후 다시 등장한 흥국사
흥국사가 창건된 이후 이상하게도 17세기 후반까지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를 않다. 도중에 절
이 파괴되거나 곱지 않게 문을 닫으면서 오랜 세월 방치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아무리 그
래도 1,000년 동안 이렇다 할 내력과 유물(경내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 300여 년 묵은 상수리나
무와 18세기에 만든 약사전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임..)
이 전혀 없으니 절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에 고려 때 창건되었을 가능성 조차 적어 보인다. 혹여 조선 중기(16~17세기)에 창건
된 것을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끌어올린 것은 아닐까? 그들이 주장하는 창건시기부터 17세
기까지 이해가 어려운 오랜 공백이 존재하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그저 난감할 뿐이다.

어쨌든 17세기 이후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면, 1686년(숙종 12년)에 절을 중창했다고 하며, 이
때가 진정한 창건시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리고 1758년(영조 34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
타전(彌陀殿)에 아미타불을 새로 만들어 모셨다.
1770년(영조 46년) 겨울, 영조(英祖)가 그의 생모(生母)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무덤인 소녕원
(昭寧園,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을 참배하고 환궁하다가 갑작스런 폭설을 만나 흥국사에서 하룻
밤을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왕은 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보며 시(詩) 한 수를 지었는데,
그걸 편액(扁額)으로 만들어 절에 하사하고, 돈과 쌀을 지원하여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이렇게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은 흥국사는 왕실의 또 다른 원찰(願刹)이 되어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
원했다.

1785년(정조 9년)에는 승려 관선, 법헌 등이 절을 중창하였고, 1792년 후불(後佛)탱화를 제작하
여 봉안했으며, 1854년(철종 5년) 400근짜리 종과 칠성목탱 등을 시주받았다. 1867년 곽명이 약
사전을 중건했으며 1876년에는 칠성각(七星閣)을 중건했다. 1878년에는 왕실에서 내린 돈으로
거대한 괘불을 조성하고 1886년 팔상탱화와 신중탱화를 만들어 봉안하였다.
6.25전쟁 때는 다행히도 총과 폭탄이 알아서들 비켜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으며 그 이후 설법전,
요사 등을 새로 지어 지금에 이른다.

4. 현재의 흥국사
조촐한 흥국사 경내는 법당(法堂)인 약사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명부전, 삼성각, 설법전 등 7~8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극락구품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약사전,
괘불(掛佛) 등 지방문화재 4점과 향토유적 1점, 보호수로 지정된 상수리나무 3그루가 있어 절의
적지 않은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가람배치는 하나의 법당과 탑으로 이루어진 1금당 1탑 형식으
로 약사전 앞에 5층석탑이 서 있다.

흥국사는 매월 1,3째 토요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여 중생들에게 산사 체험과 예
불(禮佛), 다도(茶道)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하루종일 예불과 참선 등으로 몸이 좀 고달프긴 하겠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수양
할 수 있는 기회로 몇 번 쯤은 해볼만한 체험이다. 나도 아직 경험은 없지만 조만간 도전해볼
생각이다. (몇 년째 말로만...)

이곳은 숲이 무성한 아늑한 산중으로 속세를 등지고 한동안 묻혀 지냈으면 하는 충동을 일으키
며, 마음을 수양하고 참선하기에 딱 그만인 곳이다.

▲  흥국사 범종각(梵鍾閣)

▲  흥국사 연못

※ 흥국사 찾아가기 (2011년 12월 기준)
* 서울역(1,4호선 9-1번 출구), 을지로입구(2호선 3번 출구), 광화문(5호선 7번 출구), 서대문(
  5호선 4번 출구), 녹번역(3호선 1번 출구), 불광역(3,6호선 8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04
  번을 타고 흥국사입구 하차
*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과 구파발역(1번 출구와 2번 출구 중간)에서 34,
  704번 시내버스 이용
* 주말과 휴일에는 구파발역(1번 출구와 2번 출구 중간)에서 북한산성입구를 오가는 8772번 주
  말임시노선이 10~15분 간격으로 추가 운행된다. (흥국사입구 경유)
* 흥국사입구 정류장에서 절까지 도보 10분 거리
* 연신내 메트로타워(연신내역 1번 출구와 2번 출구 중간)에서 흥국사 셔틀차량이 매일 오전 9
  시 40분에 출발하며 구파발역 1번 출구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한다.
* 승용차 (일주문 앞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시내 → 연신내에서 우회전하여 직진 → 입곡3거리에서 우회전 → 흥국사입구에서 좌회
   전 → 절골마을 → 흥국사
② 서울외곽고속도로 → 송추나들목에서 구파발 방면 → 북한산성입구 → 흥국사입구에서 우회
   전 → 절골마을 → 흥국사

♠ 흥국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 없음
* 흥국사 괘불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89호)은 사월초파일과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
  등 주요 행사 때만 제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 흥국사 템플스테이 관련 정보와 온라인 신청은
☞ 여기를 클릭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 (☎ 02-381-7970~1)
* 흥국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하기 바란다.


▲  흥국사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위용

▲  가을하늘의 조그만 거울, 흥국사 연못


▲  수령(樹齡) 300년의 상수리나무

일주문을 지나면 흥국사의 불전(佛殿)이 서서히
히 솟아나듯 보이기 시작한다. 설법전 아래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조그만 연못이
놓여져 있는데 개구리가 꾸벅 졸고 있는 연못의
잔잔한 수면에는 낙엽이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그들의 심정은 아마도 복잡들 하
겠지. 주변 나무들은 연못을 거울로 삼으며 그
들의 가을의 옷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연못 곁에는 고양시 보호수로 지정된 상수리나
무가 있다. 가을에 걸맞게 치장된 이 나무는 17
세기 후반, 흥국사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
낸 시절에 심어져 절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한
오랜 벗이다.

하늘로 곧게 솟아나지 못하고 약간 구부러져 있
으며 세월의 무게를 버티기 어려운지 철로 만든
기둥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니 역시 세월 앞에
장사는 없는 모양이다. 경내에는 이 나무 외에
도 수령 200~300년 먹은 오랜 나무가 2~3그루
더 있다.


▲  연못 북쪽 돌방(石室) 안에 자리한 불상, 동자 식구들

연못 북쪽에는 조그만 존재들의 보금자리인 돌방이 있다. 인자한 표정으로 시무외인(施無畏印)
을 하며 앉아있는 금동불. 그의 목에는 커다란 염주가 걸려 있다. 2005년에도 있더니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우측에는 하얀 색의 커다란 조개 껍데기가 놓여져 있는데 그 안에
는 귀여운 모습의 동자상이 앉아있다. 다들 근심이 없는 편안한 모습들, 그런 그들에 잔뜩 시샘
이 간다.


♠  흥국사 경내 둘러보기

▲  흥국사 설법전(說法殿)

흥국사의 강당(講堂)인 설법전은 'ㄱ'자 형태의 커다란 건물로 경내가 외부에 온전히 보이지 않
도록 가리고 있다. 설법전 앞에는 괘불을 거는 높다란 깃대가 솟아 있으며 불단에는 흥국사가
자랑하는 보물 2점이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04호

극락구품도를 뒷배경으로 삼아 유리상자 안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좌상,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이 불상은 나
무를 깎아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이다.
 
불상의 머리는 꼽슬머리(螺髮)로 머리 정상에는
육계(= 무견정상)가 약간 튀어나왔고, 이마에는
둥그런 백호가 떠 있으며, 눈썹은 홍예다리처럼
구부러져 있다. 좌우로 긴 두 눈은 아래를 바라
보며 지그시 떠 있고 코는 오목하다. 붉은 입술
에는 미소가 살짝 담겨져 있고, 귀는 길쭉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법의(法衣)
는 양쪽 어깨를 덮으며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
내렸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1758년에 불상을 손질했다는
기록을 통해 대략 18세기로 여겨지며 불상의 높
이가 겨우 2자 남짓에 무게도 가벼워 도난의 위
험이 도사리므로 지금은 유리상자 안에 봉안했
다. 새장처럼 상자 안에 갇힌 아미타불, 아무리
보호 때문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갑갑할까..
불상의 사진은 문화재청 사진을 참조했다.


▲  극락세계를 담은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아미타여래좌상의 후불탱화 대신 걸려 있는 극락구품도는 전체를 9등분하여 극락세계를 묘사한
그림으로 가로 2m, 세로 1.4m의 불화(佛畵)이다.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아미타회상(會相) 장면
4면과 왕생(往生) 장면 5면으로 구성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희귀한 그림으로 상품(
上品)의 극락정토와 중삼품(中上品), 중중품(中中品)의 왕생정토를 묘사했다고 한다.
그림에 나오는 극락세계의 궁궐은 우리나라 궁궐 건축물과 흡사하여 친근감을 주며 황토색과 녹
색을 중심으로 채색되었다. 각 그림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담겨져 있으나 내용이 어렵고 복잡
하여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그림은 19세기 후반 수락산 흥국사에서 활약한 화승(畵僧) 금곡당 영난(金谷堂 永煖)이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

설법전의 옆구리로 경내로 들어서면 5층석탑을 중심으로 한 경내가 펼쳐진다. 석탑 정면에는 흥
국사의 법당(法堂) 약사전이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휘날리며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나한전과 명
부전이 자리를 지킨다.

약사전(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57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동쪽을 바라보는 동향인데,
이는 약사불이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이라 그런 배치를 취했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70년(영조 46년) 절을 중건할 때 기존 약사전을 크게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최소한 18
세기 이전부터 존재해 있던 듯 싶다. 지금의 건물은 1867년(고종 4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평방
(平枋) 위로 공포들로 가득한 다포(多包) 양식을 하고 있다.
그리 화려하지도 그리 크지도 않은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불전 양식
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약사전을 받들고 있는 석축에는 고색의 때로 만연하여 흥국사의 굵
직한 내력을 보여준다.

약사전 불단에는 약사전의 주인장 약사여래불이 동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이 불상은 18세기
후반, 약사전을 크게 확장하면서 만든 것으로 얼굴의 볼 부분에 살이 많아 뚱뚱하면서 약간 둔
한 인상을 주나 나름대로 포근하고 귀여운 인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케 해준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훤하게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그의 왼손에는 다른 약사불과 마찬
가지로 약합 1병이 들려져 있으며 그의 뒤에는 1792년(정조 16년)에 그려진 약사후불탱화가 든
든히 자리해 있다.

◀  악귀(惡鬼)를 쫓으려는 의도로 약사전 계단
에 배치된 돌사자 1쌍

사자의 모습이 너무 고양이처럼 귀엽고 사랑스
러워 사자의 용맹함은 도저히 보이질 않는다.
악귀들도 그의 귀여움에 넋이 나간 나머지 그만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돌아가는 것은 아닐
까?


▲  흥국사 나한전(羅漢殿) - 고양시 향토유적 34호

약사전 우측에는 맞배지붕에 '卍'마크가 새겨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나한전이 있다. 이 건물
의 건립시기는 18세기 이후로 여겨지며 원래는 나한전이 아닌 칠성각(七星閣)으로 1876년에 중
건되었다. 1996년까지 칠성각으로 쓰이다가 칠성신을 모신 삼성각(三聖閣)을 따로 세우면서 삼
성각에 통합되었다. 그래서 이 전각을 무슨 용도로 쓸까 머리를 굴리다가 1902년에 나한전을 세
웠다는 기록이 있어 가람배치에 맞게 나한전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와 후불탱화, 16아라한(阿羅漢)을 모셨으며 1878년에 그려진 괘불(掛佛)은
주로 이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  나한전 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화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며 조용히 명상에 잠긴
부처의 모습, 그 주변으로 16명의 아라한(阿羅
漢)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앉아 있고, 불상 뒤
에는 1832년에 그려진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  흥국사 5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약사전 좌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명부전이 나한전을 마주 본다. 지붕에 卍
마크가 있으며, 거의 나한전과 쌍둥이꼴이다. 이 건물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망자(亡者)를
심판하는 염라대왕(閻羅大王) 등의 10왕, 판관(判官) 등 명부(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모셔져 있
다.

약사전 앞뜰에는 근래에 만든 5층석탑이 있다. 하얀 피부의 때깔이 고은 탑 안에는 부처의 사리
1과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  흥국사 삼성각(三聖閣)

경내 서쪽 구석에는 1996년에 지은 삼성각이 드넓은 공터를 지킨다. 이곳에는 칠성(七星, 치성
광여래)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삼성(三聖)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치성광여래(칠성신) 금동목각탱화

산신과 독성을 협시불로 대동하며 가운데에 자
리한 치성광여래불, 산신과 독성과 달리 여래(
如來)의 반열까지 오른 칠성신은 그런 이유 때
문인지 특별하게도 금동탱화로 만들었다. 탱화
가 얼마나 화려한지 약간은 어두운 삼성각 내부
를 대낮처럼 환하게 비쳐준다.
탱화 앞에는 치성광여래 3존불이 돌로 만든 연
화대(蓮花臺)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중생을 넌
지시 맞이한다.

◀  수령 250년의 상수리나무
삼성각 앞쪽에는 수령 250년이 넘었다는
상수리나무 1그루가 또아리를 틀었다.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 3.3m 
지정번호 : 경기-고양-31호


▲  자연과 부처의 마음이 담긴 흥국사 약수터
뿔이 둘 달린 용의 입에서 옥계수(玉溪水)가 졸졸 흘러나와 중생들의 마른 목을 축여준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은 늘 쉬지 않고 졸졸졸 나온다고 한다.

▲  약사전 뒤에 또 다른 상수리나무

약사전 뒤에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나무의 높이는 12m에 불과
하나 약사전보다 약간 높은 곳에 둥지를 트고 있어 상당히 커 보인다.
흥국사에는 특이하게도 200~300년 먹은 상수리나무가 경내 곳곳에 뿌리를 내렸는데 풍수지리(風
水地理) 때문일까? 아니면 절의 주지승이 그 나무를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참으로 궁금할 따
름이다. 나무의 둘레 - 3.3m, 지정번호 : 경기-고양-30호

어쩔 수 없는 속세인(俗世人)으로써 몸뚱이는 다시 속세로 나와야되지만 속세에 의지할 데 없는
마음만은 절에 고스란히 남겨두며 늦가을 흥국사 나들이는 이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동호회)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글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1년 12월 27일부터


Copyright (C) 201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by 백사골선비 | 2011/12/31 19:51 | 수도권 사진/답사기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